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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식/공통

향수의 작가 정지용 시인의 신앙시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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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언론사를 통해 정지용시인에 대한 전집 출간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일반인들에게는 ‘향수’라는 시와 노래로 더 널리 알려진 시인에 대한 전집입니다. 그러나 언론의 발표는 정지용 시인이 당시 천주교 정기 간행물 ‘가톨릭청년’ 의 편집 고문을 맡았었고 신앙시를 발표했었다는 내용이 잘 안보였습니다. 아마 순수한 문학적인 부분을 논하는 입장이라 그랬을 것으로 보입니다. 

기사 원문 참조 :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150512233808792

그렇다면 정지용이라는 천주교 교인과 그의 신앙시의 세계는 어떨까요?. 한국천주교회사 제5부 내용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정지용 소개

정지용은 한의사인 아버지 태국(泰國)과 어머니 정미하(鄭美河)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2세 때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했으며,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입문했습니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박종화·홍사용·정백 등과 사귀었고,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내기도 했으며, 신석우 등과 문우회(文友會) 활동에 참가하여 이병기·이일·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습니다.

 

1923년 4월 도쿄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유학시절인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인 〈학조 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습니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 평론가 이헌구, 시조시인 이병기 등과 사귀었습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6월에 창간된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을 맡았고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이 간행물에 그의 신앙시를 대부분 발표하였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습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餘適)과 사설을 맡아보았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강연에 종사했습니다.

1950년 6·25 때 납북된 뒤 행적이 묘연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평양에서 발간된 「통일신보」(1993.4.24., 5.1., 5.7.)에서 가족과 지인들의 증언을 인용해 정지용이 1950년 9월경 경기도 동두천 부근에서 미군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행적에 대한 갖가지 추측과 오해로 그의 유작의 간행이나 논의조차 금기되다가 1988년도 납·월북작가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로 작품집의 출판과 문학사적 논의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상 내용은 정지용에 대한 백과사전에 소개되어 있는 내용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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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의 신앙시

정지용의 신앙시는 대부분 ‘별’과 ‘가톨릭청년’’이라는 정기간행물에 발표하였습니다. 잡지 ’별’은 1927년 7월 10일 창간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주로 신앙적인 주제의 작품들이 실렸는데 정지용을 제외하면 대부분 일반 독자의 작품이 많았습니다. '가톨릭청년'은 1933년 6월에 창간되었는데 정지용은 이 잡지의 편집고문을 맡았습니다. 당시 정지용은 이 잡지에 15편의 시를 발표하였는데, <해협의 오전 2시>,<비로봉>,<임종>,<별>,<은혜>,<갈릴레아 바다>,<시계를 죽임>,<귀로>,<다른 한울>,<또 하나 다른 태양>, <불사조>,<나무>,<승리자 김안드레아>등입니다. 이 중에서 <갈릴레아 바다>는 그의 대표적인 신앙시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갈릴레아 바다

나의 가슴은/조그만 갈릴레아 바다.

때업시 설레는 파도는/한 풍경을 일울 수 업도다.

녜전에 門弟들은/잠자시는 를 깨웠도다.

주를 가만 깨움으로/그들의 신덕은 복되도다

돗폭은 다시 펴고/키는 방향을 차젓도다.

오늘도 나의 조그만 갈릴레아에서/주는 짐짓 잠자신 줄을

바다가 바다가 잠잠한 후에야/나의 탄식은 깨달엇도다. 

(전문)

이 시는 신약성서 마르코 복음 4 35절에서 41절까지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옛 제자들과 오늘의 제자를 대비적으로 표현한 신앙시입니다. 옛 제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주를 깨웠으나 화자 자신에게는 옛 제자들만한 믿음이 없음을 뒤늦게 깨달아 탄식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시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

얼골이 바로 푸른 한울을 우러렀기에/발이 항시 검은 흙을 향하기 욕되지 않도다.

곡식알이 거꾸로 떨어져도 싹은 반듯이 우로!/어느모양으로 심기어졌더뇨?/이상스런 나무 나의 몸이여!

오오 알맞은 위치좋은 우아래!/아담의 슬픈 유산도 그대로 받었노라.

나의 적은 연륜으로 이스라엘의/이천년을 헤였노라./나의존재는 우주의 한낱 초조한/오점이었도다.

목마른 사슴이 샘을 찾어 입을 잠그듯이/이제 그리스도의 못박히신 발의/성혈聖血에 이마를 적시며-

오오신약新約의 태양을 한아름 안다.

(전문)

시 출처 : 정지용문학관

 

정지용은 ‘가톨릭청년’ 제 16호(1934년)에 방제각이란 이름으로 <승리자 김대건안드레아>라는 장시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는 이 시를 통해 김대건 신부의 순교 정신을 높이 찬양하고, 그 당시 가톨릭을 탄압한 위정자들의 횡포에 대한 신앙적 지조와 승리를 하나의 정신적 가치로 형상화 하였습니다.

(한국천주교회사 제5부 p440-447 참조)

 

한국 현대 모더니즘 시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천주교 신앙시를 17편이나 발표했던 시인 정지용은 그의 월북이냐 납북이냐를 놓고 한동안 한국 내에서 논의 되지 못하다가 1988년에 와서야 해금되어 그의 시 세계와 작품이 정리되고 발굴되어 공개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의 최동호교수팀이 정리하고 새롭게 발굴한 그의 작품들과 더불어 이러한 그의 신앙시도 재조명 받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 위 글은 2015.5.14일에 쓴 내용을 옮겨 온 것입니다. 이진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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