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89년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반군은 농촌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할 수 있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PDPA도 도시지역에 대한 지배를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1992년 공산주의 정부가 전복되자 옛 게릴라 반군, 종교지도자, 지식인 등으로 이루어진 폭넓은 이슬람교 단체 연합이 의장을 포함해 51명으로 구성된 통치회의를 카불에 결성하고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 과도 정부는 모든 반군 파벌들의 지원을 받지 못해 정부 및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걸친 지방 통치의 미래는 불확실했다. 이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군사적 상황은 여전히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의 평균수명은 약 46세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결핵과 세균성·아메바성 이질의 발생률이 높으며, 의사와 병원시설의 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성인의 문자해독률은 약 25%에 지나지 않는다. 1979년 정부에서 7~15세의 어린이를 위한 무료 의무교육제도를 처음 실시했으나 초등학교 취학연령 어린이들 가운데 실제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는 1/3에 불과하며, 전쟁 때문에 고등교육의 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언론매체는 철저히 정부의 통제를 받으면서 선전기관 역할을 하고 있다. |
아프칸의 역사
아프가니스탄은 다양한 문화가 만나는 전략적인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지금의 명칭으로 처음 이슬람 자료에 나타난 것은 982년이었다. BC 6세기에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일부인 키루스 2세의 지배를 받았으며, BC 4세기에는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정복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일부 지역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또 일부는 인도 북부에 근거를 둔 마우리아 제국에 넘어갔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박트리아(지금의 '발흐' 지방) 총독통치령에서 박트리아 왕국이 생겨나 그리스와 인도의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선보였다.
BC 2세기에는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78~144경)에게 정복되었다. 에프탈 왕조와 사산 왕조를 거치면서 힌두교의 영향권에 들어섰으며, 870년경 사파르 왕조시대에는 이슬람교가 튼튼히 뿌리내렸다. Islam was brought to Afghanistan during the eight and ninth century by the Arabs
1219년에는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족의 침략을 받았으며, 몽골 제국이 무너짐에 따라 독립된 제후국들로 분리되어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으로 인도 무굴 제국과 페르시아 사파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700년대초 페르시아 군주 나디르 샤에 의해 무굴 제국으로부터 벗어났으며, 나디르의 경호대장 아흐마드 칸 아브달리가 아흐마드 샤 두라니라는 이름으로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굳히고 왕위를 계승하면서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1772년 두라니가 죽은 후 부족 또는 종족 단위 사회로 회귀하려는 경향과 러시아·영국의 제국주의적 음모로 제국은 붕괴되었으나 여러 차례 전쟁(1839~42, 1878~80, 1919)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점령을 시도한 영국에게 항복하지 않음으로써 기본적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군주제 아래 1930년대부터 계속 신중하고 온건한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이룩했으나, 1970년대 정당정치가 안정을 잃게 되고 1973년 좌익 파르캄('깃발'이라는 뜻)당이 지원한 군사혁명이 성공하면서 군주제가 종식되고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77년 파르캄당과 좌익 칼크('대중'이라는 뜻)당이 연합하여 PDPA(the Peoples Democratic Party of Afghanistan )를 결성했고, 1978년에는 함께 정권을 잡기도 했으나 두 정파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이들의 마르크주의적인 개혁정책으로 농촌에서 큰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나자 1979년 기존정권 수호라는 명분 아래 소련군이 침공했다.
뒤이어 벌어진 전쟁에서 PDPA를 무너뜨리고 소련군을 몰아내려는 여러 반군 단체(The CIA began providing military training to the Mujahadeen – the name the Islamic guerillas came to be called. )들이 게릴라전을 개시했으며, 수백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시민들은 소련군의 반군 진압작전을 피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달아났다. 소련군 침공 후 게릴라군이 대부분의 농촌지역을, 소련군이 도시지역과 지방수비대 부근지역을 나누어 지배하며 대치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노력 끝에 1988년 5월부터 1989년 2월 사이에 10만 명의 소련군이 철수했으나, PDPA가 반군을 궁지에 몰아넣고 주요 도시들을 계속 지배하려 하자 PDPA와 반군 사이의 무력투쟁이 끊이질 않았다.
참고로 미국이 무자하딘을 위해 지원한 내용과 오사마 빈 라덴이 그때 당시 미국에게는 PDPA와 소련을 물리쳐줄 중요한 게릴라군이었음을 알수있다.
At the same time the CIA kept increasing and updating the Mujahadeen’s supply of weaponry, the Saudis and Persian Gulf Emirates contributed billions of dollars to their coffers, and thousands of Arabs responded to the Mujahadeen’s call for jihad, or holy war, against the secular Soviets – including the wealthy Saudi playboy, Osama bin Laden – who quickly became one of the CIA’s most important operatives in its proxy war against communism.
1992년 4월 마침내 반군 세력이 모하마드 나지불라 대통령의 공산주의 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14년(1978~92)에 걸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났다. 전쟁으로 인해 200만 명이 사망했고 5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국토는 폐허가 되는 참화를 겪었지만 평화가 정착되지는 않았다. 민족이나 종교적 분파에 따라 나뉜 여러 게릴라 세력들 간의 크고 작은 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The collapse of the PDPA government did not mark the end of Afghanistan’s civil war. The Mujahadeen warlords continued to bring death and destruction upon the country as they fought over the spoils, and sought to enlarge their new fiefdoms at the expense of their neighboring rivals.)
과도기에 대통령직을 맡았던 시브가 툴라 모자데디가 1992년 6월 게릴라 지도자들의 회의기구를 이끌던 부라누딘 라바니에게 권력을 넘겼으나, 유혈사태가 종결되지는 않았다. 근본주의자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가 이끄는 이슬람당은 카불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또한 시아파 이슬람교 당파 8개가 연합한 통일당은 이란의 지원을 받았는데 과도정부에 대해 권력 분점(分店)에 대한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미국 국무부 보고서에 의하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정권을 장악한 측이 과거 적으로 분류된 사람들에 대한 인권 유린과 살인을 자행하고 있었다. 프랑스·이탈리아·불가리아가 자국 외교관들을 철수시키는 등 상황은 악화되었다고, 파키스탄과 이란에는 여전히 수백 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있었다.
1992년 12월 30일 1,335명의 대표로 구성된 의회에서 라바니가 2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는데, 이에 대해 10개의 주요 반군 세력 중 5개가 의회를 비난하며 라바니를 대통령에 선출한 것은 전쟁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의회는 오로지 이슬람교도에게만 정부의 일을 맡겼고 비(非)이슬람 기구 설치를 금지했으며 방송도 이슬람 율법에 따르도록 했다.
국방장관 아흐메드 샤 마수드 휘하의 정부군과 헤크마티아르를 따르는 헤즈브 이 이슬라미 사이에서 주로 발생한 끝없는 전투에도 불구하고 1993년 5월 22명으로 구성된 내각이 짜여졌으며, 수도 카불에 있는 마수드의 건물을 점령한 헤크마티아르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아프가니스탄은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에게 자금 등의 원조를 요청해 국가 정상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1994년 1월 헤크마티아르의 군대와 아브드 알 라시드 도스탐 장군의 군대가 연합해 수도 카불을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카불은 잿더미가 되었고 카불 인구 200만 명 중 150만 명이 이 지역을 탈출했으며 카불 바깥지역에는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았다. 1994년 3월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국제연합(UN) 사무총장이 튀니지의 전(前)외무장관 마흐무드 메스티리를 대표로 한 평화사절단을 아프가니스탄에 보내는 등 평화정착에 노력했으나 성과는 별반 없었다. 라바니 대통령의 임기가 1994년 6월로 끝이 났지만 그는 권좌를 내놓지 않았고 아프가니스탄 대법원은 그의 임기를 6개월 연장했다.
아프가니스탄 정국이 계속 혼미를 거듭하고 있던 중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파키스탄 서부에서 이슬람 율법을 공부하던 학생들이 1994년 탈리반(Taliban)을 결성, 라바니 대통령과 다른 반군들을 대상으로 무장투쟁을 개시했다. 이들은 이슬람 율법을 엄격히 시행할 것을 주장하는 원리주의를 표방했다. 탈리반의 무장투쟁은 정권과 군벌의 학정에 시달리던 많은 민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에 따라 탈리반은 무장투쟁 2년 만인 1996년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라바니 대통령을 축출해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탈리반 정권은 극단적인 원리주의를 표방하며 여성을 억압하고 이슬람 이외의 종교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을 가했다. 특히 2001년 3월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미안 석불을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탈리반 : 1994년10월 아프칸 남부 칸다하르주(州)에서 결성된 무장 이슬람 정치단체
페르시아어로 '학생들'이란 뜻. Taleban이라고도 씀. 1996~2001년 5년간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집권 세력. |
정치·종교적으로 극단적 보수주의 분파로 소련군 철수, 공산정권 붕괴, 내전 돌입으로 아프가니스탄이 혼란스러웠던 1990년대 중반에 출현했다. 탈리반이란 이름은 구성원이 대부분 마드라샤에 다니던 학생들인 데서 따왔다. 마드라샤는 1980년대 파키스탄 북부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에 세워진 이슬람 신학교이다. 탈리반은 1994년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 지방에서 질서를 잡는 군사활동을 전개하며, 재빨리 남부 지방을 지배하던 군벌을 몰아냈다. 1996년말 해외에 있는 보수적인 이슬람 분파의 지원과 아프가니스탄 남부 파슈툰족의 지지에 힘입어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북부의 타지크족, 서부의 우즈베크족, 중부의 하자라족 등 비파슈툰족들은 탈리반에 계속 저항했다. 이들은 파슈툰족으로 구성된 탈리반의 집권이 전통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한 파슈툰족의 집권 연장이라고 여겼다.
1999년 8월 현재 탈레반은 카불을 포함하여 아프가니스탄의 90%를 점령하고 있으며 북쪽지방에 주둔한 소수파 중심의 반군연합 세력과 교전하면서 아프간에서는 내전상태가 계속 되고 있다.
탈레반은 소비에트 연방에 맞서 싸웠던 무자헤딘 세력으로부터 아프가니스탄의 영토 3분의 2을 장악하면서 아프간의 새로운 통치세력으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전문가들은 탈레반의 이같은 급격한 군사적 성공으로 봐서 파키스탄의 군사 정보국에 의해 이들이 창설된 것으로 보고 있다.
35세 된 탈레반의 창설자이자 최고 지도자인 모하메드 오마르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무자헤딘의 전사로도 싸웠던 경력이 있는 성직자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의 정치적 목표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신정 국가를 창설하는것이다. 모하메드 오마르는 최근 서기 5세기경의 고대 불상을 포함한 모든 불상들을 이슬람에 대한 모독으로 규정하는 포고문을 발표,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도록 파괴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탈리반의 기관매체인 바흐타르 통신에 발표된 이 포고문에서, "신은 유일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나 인물의) 형상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다. 이들 불상은 지금부터 신앙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거돼야 한다"고 말했다.
오마르가 파괴를 지시한 세계 최대 마애석불이 있는 바미얀 지역에서는 아직도 주민 대부분이 불교 신자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탈레반 정부를 인정하고 나라는 전 세계에서 파키스탄을 포함에 3개국에 불과하며 이들은 이같은 세계의 고립화 움직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세계적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극한 행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무이누딘 하이더 파키스탄 내무장관은 불상 파괴작업에 대해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느끼는 고립에 대한 저항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으며, 파키스탄 회교연맹당 당수도 "불상파괴 조치는 서방국가의 대(對)아프카니스탄 조치에 대한 대응"이라고 덧붙여 이를 반증하고 있다.
2001년 무렵 탈리반은 일부 북부지역을 제외한 전국을 장악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탈리반의 각종 사회정책, 여성의 사회활동 억제, 바미안 석불과 같은 비이슬람 종교 유적 파괴, 범죄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 등을 비판했으며 탈리반 정권을 인정한 나라는 극소수였다. 무엇보다 탈리반은 수차례에 걸쳐 미국인에 대해 테러를 가한 혐의로 기소된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은 이슬람 전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더욱 고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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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시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방부 건물이 비행기 테러를 당하자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 )이라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를 테러의 배후 조종자로 지명, 그가 은신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그를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를 집권 탈리반이 거부하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습, 전쟁에 돌입했다. 미국 주도의 일부 서방국가와 아프가니스탄의 반군세력인 북부동맹이 이 전쟁에 합세한 끝에 탈리반은 붕괴되었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2001년 11월 26일 독일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4개 정파(로마그룹, 페샤와르그룹, 북부동맹, 키프로스그룹)가 참여해 파슈툰족 출신인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내각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2004년 11월 카르자이는 임기 5년의 민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어 12월에 취임함.
새로이 출범한 아프칸 정부는 미국을 등에 업고 출범한 정부라는데 문제가 있다. 그리고 탈리반이라는 반정부 세력이 엄연히 존재(물론 탈레반이 극단주의 때문에 안팎의 비난을 받긴 했으나 여전히 아프간인들 상당수, 특히 남부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하고 있어 아직 불완전한 정부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프칸의 지형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