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역사 History of Tibet
티벳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뵈(Bo)라고 부르든지 아니면 카와잔 뵈(Khawajen Bo)라고 한다. "눈 덮인 땅"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역사 기록은 2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제국,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 중국의 周 왕조 말기와 비슷한 시기이다.
티벳 역사 초기 8세기 동안은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왕조가 통치했다. 종교적으로는 무당들이 주도하는 점, 마술, 희생 제사가 널리 행해지는 정령신앙(애니미즘)의 시대였다. 정치적 세력은 왕가에 집중되어 있었고, 백성들은 왕족을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첫 번째 7명의 왕은 허공에 걸린 마법의 사다리를 타고 그 땅을 다스리기 위해 내려 왔으며, 죽을 때가 되면 다시 그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나 궁정 내부에 모종의 갈등이 생기자, 8번째 왕이 사다리가 매달린 밧줄을 끊어 버렸다. 그때부터 티벳 왕들은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아내와 부장물과 함께 거대한 무덤 속에 묻혔다.
초기 왕조는 동쪽에서 오늘날의 쩨땅 근처인 짱추 방면으로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얄룽 계곡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주변 종족들을 정복하고 영토를 넓혀 나갔다. 그리하여 군사력을 기반으로 봉건제도가 확립되었다. 티벳 왕조에 병합된 각 종족들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었고, 언어와 종교적인 경향도 비슷했기 때문에 쉽게 융합되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은 넓이 약 100만 평방 마일, 평균 높이 약 4000미터에 달하는 티벳 고원이었다. 그렇게 높은 지역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신체적으로도 타고나야 한다. 그곳 토박이의 후손으로 태어나기 전에는 적응하기가 힘들다. 티벳 말은 그 주변 국가인 고원 아래의 몽골, 인도, 중국, 터키 어 등과 상당히 다른 티벳-버마어족에 속한다. 고대의 티벳 사람들은 자연계의 사물이나 현상, 특히 산과 하늘을 신성하게 여겼다. 그래서 땅 아래, 땅 위, 그리고 하늘에 있는 수많은 신들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드리고 점을 치는 종교 행위가 성행했다.
고원 산악 지대의 문화는 평지의 문화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영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고원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수명이 짧다. 그리고 장관을 이루고 있는 주변 산들은 자연스럽게 명상적인 분위기로 이끈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영적인 분위기를 실제 생활에 연결시켰다. 대부분의 샤머니즘이 그러하듯이, 고대 티벳의 샤머니즘도 현실적인 성공, 전쟁에서의 승리, 건강, 부, 자손의 번창 등을 구했다. 특히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던 시기에는, 용한 무당이 왕권 수호를 비는 굿판을 벌이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었다. 그에게는 절대 권력이 주어졌다. 무당은 하늘에서 왕의 후손이 내려오기를 기원하는 굿이나, 왕이 내려온 것을 축하하고 왕국의 안녕을 위해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신들의 도움을 청하는 굿을 주도했다. 옛 왕이 물러간 다음 새 왕을 등극시키는 것도 무당의 일이었다. 왕권이 바뀌는 공백 기간에는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알기 위해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가서 자문을 받아 오기도 했다. 무당은 죽은 자들 세계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그 혼돈의 힘이 산 자들의 세계를 혼란스럽게 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도 했다.
티벳 왕조 문화는 여러 세기 동안 번성했다. 낮은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들은 높은 고원 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티벳을,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침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대 티벳 문화는 외부의 간섭 없이 발전할 수 있었다. 티벳 종족들 간의 영토 분쟁은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A.D. 6세기에는 고원 지대 전체가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었다. 통일로 인해 강력해진 티벳 제국은 고원 아래 지역을 사방으로 점령해 나갔다. 그리하여 중국, 몽골, 터키, 인도 등에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군사적인 대제국 건설은 7세기 초, 송쩨 감뽀 황제 시대에 마무리되었다. 무력을 기반으로 한 통일 제국은 그 결속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또한 티벳 사람들은 고원 아래 평지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일에도 흥미를 잃었다. 그래서 송쩨 감뽀는 윤리와 도덕에 토대를 둔, 보다 평화적이고 영적인 방향으로 티벳 문화의 흐름을 바꾸기 시작 했다. 그는 인도의 팔라 왕조와 후-굽타 왕조, 실크로드 주변에 산재한 중앙 아시아의 여러 도시국가, 그리고 중국 당나라의 정신적인 등뼈가 된 대승불교를 받아 들여 티벳 문화를 체계적으로 개혁해 나가기 시작했다.
송쩨 감뽀는 학자들을 인도로 보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게 했다. 그런 다음 산스크 리트어를 기반으로 티벳 문자를 만들어, 여러 가지 불교 문헌을 티벳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 아홉 나라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그 중에는 네팔과 당나라의 공주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을 통해 수많은 불경과 불교 예술품을 티벳으로 끌어 들였다. 또한 새로운 도읍지 라사에 조캉과 라모체라는 왕궁 사원을 건립하여, 온나라의 종교적 중심지로 삼았다.
이후 약 250년 동안, 티벳의 왕들을 송쩨 감뽀의 뒤를 이어 문화적인 개혁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경전 번역, 연구 기관 설립, 사원 건축, 교육 사업 전개 등이 이 시기에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이 문화적인 개혁은 티송 데짼 시대인 79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데짼 왕은 인도에서 온 성자 파드마 삼바바와 철학자 샨타라크쉬타의 도움을 받아 삼예에 티벳 불교 최초의 승원삼예 사원을 세웠다. 샨타라크쉬타가 그 승원의 승원장이 되었다. 이때 인도의 불교 대학 제도와 커리큘럼이 함께 소개되었다.
티송 데짼은 또한 아시아 전역에서 다방면의 학술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 학술 도입 사업은 이후 60년 동안 계속되었다. 불교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수학, 약물학, 시, 예술, 정치학, 조각 등 다방면의 학문이 이때 발전했다. 페르시아, 인도, 위굴, 몽골, 중국의 당나라, 그리고 실크로드 주변의 여러 도시국가에서 학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가르침을 비교하고 조화시키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티벳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갖기에 이르렀다. 한 가지 예로, 830년 대에는 세계 각처에서 수백 명을 학자를 초청한 다음 그들에게 10년 동안 인도, 중국, 페르시아, 몽골, 위굴의 의학 체계를 비교하고 연구하도록 했다. 그 결과로 건강에 관련된 불교의 영적인 가르침에 더하여 심리학, 해부학, 신경생리학, 외과 의학, 식물학, 화학, 영양학 등이 종합된 티벳 특유의 의학 체계가 성립되었다.
삼예 사원이 종교적인 중심지가 된 이후, 티송 데짼의 후계자들은 삶 전체를 불교화 할 것을 강요했다. 강요의 도가 지나쳤던 까닭에 왕가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다. 암살과 반란이 계속되면서 통일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걸었고, 급기야는 여러 조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불교 탄압도 있었다. 하지만 1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불교의 가르침과 제도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지방 귀족들의 보호 아래 백성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후 3세기 동안, 백성들은 점점 더 깊이 불교에 빠져들었다. 불교적인 교육 제도가 재확립되고, 전국 방방곡곡에 승원이 세워졌다. 방대한 불경 번역 작업도 이 시기에 완료되었고, 티벳 고유의 불교 문헌들도 엄청난 양이 쏟아져 나왔다.
이후로는 티벳 제국 전체를 통치하는 통일 왕조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군사적 패권주의가 나타날 가능성 자체가 아예 없어졌다. 백 성들의 마음 속에 불교의 비폭력에 대한 가르침이 깊이 뿌리 내렸기 때문이다. 지방의 귀족들이 자기 지역을 다스렸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급속히 확장하던 승원 세력에 사 회적.정치적 관할권을 점점 더 많이 넘겨주게 되었다.
13세기와 14세기에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일대를 통일했다. 그때 티벳도 대몽골 제국의 관할권 안에 들어갔다. 하지만 티벳 사람들의 삶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티벳은 이미 13개 행정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지역은 지방 귀족과 승원이 협력하여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의 쿠빌라이 칸은 티벳 불교의 사키야 파와 콘 가문에게 티벳의 통치권을 주었다. 그러나 사키야 파는 정치적인 세력보다는 영적인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았다. 14세기가 끝나 갈 즈음, 몽골 제국의 세력이 약화되자 토착 팍모드루 왕조가 일어나 티벳 통치를 자임했다. 쯔옹 까빠가 주도한 종교 대각성 운동이 일어난 것은 그 즈음이다.
쯔옹 까빠는 1409년 수도 랏사에서 범민족적인 불교 축제를 열어, 민족 전체가 불교 수행에 헌신하는 새 시대의 막을 열었다. 쯔옹 까빠는 그 축제에서 붓다의 영원한 현존에 대한 민족적인 깨달음을 상징하는 행위로, 화려하게 장식된 조보 린포체(아띠샤)의 불상을 조캉 사원에 봉안했다. 음력 정월 초하루가 되면 온 백성이 모여 2주 동안 종교적인 축제를 벌이는 전통은 그 때부터 생긴 것이다. 축제 기간 동안에는 일상적인 모든 일이 중지되고, 승원장들이 시민의 모든 일을 책임진다. 이 축제는 1960년 티벳 정부가 인도로 망명할 때까지 티벳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연중 행사로 치러졌다.
쯔옹 까빠가 불어 일으킨 개혁의 바람은 15세기와 16세기에 이르러 꽃이 피었다. 티벳 사람들의 영적, 사회적, 현실적인 삶 전체가 변화되었다. 각 지역에서 승원의 영향력이 커졌고, 인생 전체를 포기하고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는 남녀 구도자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사회적인 분위기도 점점 더 평화로운 쪽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군인이 점점 줄어들어 지방 귀족을 호위하는 몇 사람 정도만 남게 되었다. 쯔옹 까빠가 창시한 겔룩파는 젊은 제자 겐둔 드룹빠(제 1대 달라이 라마)가 이끌어 나갔다.
겐둔 드룹빠는 오랜 세월 동안 영감이 넘치는 가르침을 베풀고 글도 많이 남겼다. 여기저기 사원도 많이 건립했다. 그가 죽은 다음, 태어나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자마자 자기가 겐둔 드룹빠라고 자칭하는 어린 아이가 나타났다. 그 아이는 겐둔 드룹빠가 살던 동네와는 다른 지역에서 태어났는데, 여러 가지 시험을 거치고 상서로운 징조들을 종합한 결과 위대한 스승 겐둔 드룹빠의 환생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충분한 교육을 받은 다음, 겐둔 갓초(제 2대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으로 겔룩파를 이끄는 영적인 스승이 되었다. 그의 다음 번 환생도 비슷한 시험과 징조를 통해 승인 받아, 소남 갓초(제 3대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을 갖고 16세기에 겔룩파를 이끌었다.
1573년 소남 갸초가 몽골을 방문했을 때, 몽골 황제 알탄 칸은 그에게 '달라이 라마 '(바다와 같은 스승)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헌사 했다.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는 이렇게 소남 갓초가 처음 들은 것이지만, 티벳 사람들은 그를 그의 앞선 두 전생의 뒤를 이은 제 3대 달라이 라마로 여긴다.
소남 갸초와 그의 뒤를 이은 제 4대 달라이 라마 욘뗀 갸초 시대에, 세속의 통치자들은 지속적으로 확산되던 종교 부흥 운동을 못마땅히 여겼다. 너나 할 것 없이 승려가 되려고 나섰고,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이 사원을 건립하고 유지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가는 데 대한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티벳은 동시대의 북유럽이나 중국 또는 일본처럼 군부 독재자가 나타나 종교 중심의 삶을 산산 조각내 버리느냐, 아니면 세속의 지도자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영적인 진화의 길을 받아들일 것이냐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조캉 대승원이 건립된 지 거의 천 년이 지난 1642년, 제 5대 달라이 라마 롭상 갸초(1617-1682)는 간덴 궁을 건립하고 티벳의 왕으로 즉위했다. 티벳 사람들은 그 이후 오늘날까지, 승왕 달라이 라마가 통치하는 간덴 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여긴다. 티벳 사람들이 '위대한 5대'라고 부르는 이 첫 번째 승왕은, 티벳의 사회적 특성에 적합한 독특한 정치 제도를 만들었다. 그는 승원과 비폭력이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체제를 구축했으며, 사실상 귀족 집단을 없애 버렸다. 그들이 세습적으로 물려 오던 토지를 몰수하고, 간덴 정부 아래서 일한 만큼 받는 보수로 살아가게 했다. 귀족들은 더 이상 사병을 거느릴 수가 없었다. 봉건 영주로써 소작 농민들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흔들던 그 당당하던 세력도 완전히 날개가 꺾였다. 당시 티벳의 소작 농민들은 중세 유럽이나 러시아의 농노들처럼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티벳은 만주(청나라)가 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했을 때, 그들과 우호 관계를 맺어 국가적인 독립과 동질성 유지를 보장받았다. 1644년, 한반도 북쪽 산악 지대에서 발원한 퉁구스 족(청나라)이 명나라가 멸망한 틈을 타 중국 내지로 진출한 다음, 주변 다른 나라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그때 청나라의 가장 강력한 적수로 떠오른 존재는 몽골이었는데, 달라이 라마는 몽골이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몽골에서 권위 있는 존재였다. 이런 사정 때문에 청나라 황제의 눈에는 티벳이 도움이 될 만한 동맹 상대국으로 보였다. 그래서 1651년 청나라 황제 순치제(세조)는 '위대한 5대' 달라이 라마와 동맹을 맺고 티벳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었다.
청나라는 달라이 라마의 티벳 통치권을 인정해 주었을 뿐 아니라, 영적인 지도자로 떠받들었다. 달라이 라마는 청나라 황제를 만주와 중국의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해 주었다. 또 불교의 진리와 수행자와 사원을 보호해 주는 국제적인 수호자로 여겼다. 달라이 라마는 몽골의 불교를 육성시켜 불교 사회로 만들고, 청나라 황제는 무장을 해제한 불교 사회를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는 약속이 티벳과 청이 맺은 동맹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티벳이 거칠기로 소문난 무력 국가인 몽골을 평화스러운 나라로 만든 것은 주목할 만한 사회 변혁의 한 예이다.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다.
18세기에 이르러 영국과 러시아가 티벳을 그들의 세력권을 만들기 위해 일부 티벳 상류층과 결합 중국으로부터 티벳을 분리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신해혁명 이후 국민당 정부는 30년부터 중국관리를 티벳에 파견하였고 34년에는 수도 라사에 몽장(蒙藏) 위원회 주(駐) 티벳 사무소를 설치, 중국의 티벳 종주권을 유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 중립적 입장을 견지한 티벳은 독립정부를 구성했으나 1949년 중국을 장악한 중국공산군에 의해 1950년 침공을 받게 되었다.
중국 공산군의 점령이후 14대 달라이 라마는 UN의 티벳 문제 개입을 호소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중국의 종주권과 티벳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17개 조항의 협정안'이 중국 당국의 강요에 의해 강제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중국군의 동부 티벳 지역 탄압과 달라이 라마의 신변문제를 계기로 1959년 수도 라사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자 달라이 라마와 그를 따르는 티벳인들이 인도로의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티벳은는 중국의 자치 구역으로서 중국과 동일한 체제로 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사유재산이 몰수되거나 아주 소수의 사원만을 남겨 둔 채 대부분의 사원이 파괴되었으며 대부분의 승려들은 투옥되거나 강제로 환속당했다.
이처럼 1950년 중국이 티벳을 침공하자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는 16세의 나이로 14대 달라이 라마에 즉위하고 UN에 티벳 문제를 호소했으나 엘살바도로만이 UN 총회에 티벳문제를 의제로 상정하는데 지지했고 나머지 국가들은 받아들이지 않아 UN 총회에서 다뤄지지 못했다. 이에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협상하고자 하였지만 중국의 강압에 의해 오히려 라사에 중국군 진주를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17개 조항"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1954년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모택동, 주은래 등 중국의 지도자들과 티벳 문제를 협상하고자 노력하였지만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아편이라고 믿는 당시 중국 지도자들의 시각하에서 또한 "티벳은 불교라는 독약에 물들어 있고, 중국은 이 티벳을 해방하기 위한 어머니 나라"임을 강조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티벳 점령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1950년 중국의 티벳 침공이후부터 지방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민중봉기가 계속되었고 1959년에 유례없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티벳인들은 중국군이 달라이 라마를 납치해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캄과 암도지방의 주요 라마승과 지역 지도자들이 중국 문화공연과 행사에 초대되었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고통스러운 경험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군이 3월 10일 달라이 라마를 경극에 초대하면서 달라이 라마의 안전을 더욱 염려하게 되었다. 티벳인들은 중국군이 경호원도 없이 오라고 한 점을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1959년 3월 10일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수천명의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가 중국 경극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블링카 궁을 둘러쌌다. 그후 며칠동안 중국이 티벳을 단념하고 완전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대중집회를 열었다. 이에 달라이 라마는 이 대규모 집회의 폭발적인 결과를 염려하면서 노블링카 궁 앞에 있는 수많은 군중들에게 해산할 것과 중국군의 노여움을 삭이고 폭력을 막기 위한 일환으로 중국군 장군에게 편지를 써 티벳인들의 희생을 막고자 하였다. 이때 상황을 달라이 라마는 자서전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양측의 화를 식히기 위해 그리고 라사의 시민들에게 절제하도록 요구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장군의 모든 편지들에 답장을 했다. 당시 나의 가장 시급한 임무는 비무장한 나의 국민들과 중국군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충돌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라사에서 전투가 일어났다. 전면적인 대치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한 모든 노력이 실패하고 중국군의 진압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자, 달라이 라마는 그의 국민을 보호하는데 국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인도로 망명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통계자료를 통해서 볼 때 당시 1959년 3월 10일 하루동안 시위에 참석한 티벳인들 중에 1만 5천여명이 사살되었으며, 민중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6,000여개의 불교사원 파괴와 12만명의 티벳인들을 학살하였다.
현재 티벳 망명정부는 인도 북부 히말라야 기슭 다람살라에는 '작은 라사'로 일컬어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다람살라에는 망명한 10만 여명의 티벳인들이 살고 있으며 3만 여명의 티벳인들이 네팔과 부탄의 티벳 정착촌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다람살라에 망명정부가 수립된 이후로 지금까지 죽음을 무릅쓴 티벳인들의 망명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중에는 중국에서는 티벳 교육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부모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어린 자식을 다람살라로 보낸 경우가 많다. 현재 다람살라의 티벳 망명정부는 티벳 언어, 역사, 종교, 문화 전반에 걸친 교육체계가 수립되어 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벳 현지의 전통문화가 중국인들에 의해 사라져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티벳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1959년에 티벳 공연예술기관을 설립했고 한편으로 중앙고등티벳학연구소를 설립해 인도에 있는 티벳인들을 위한 대학으로 만들었다. 또한 티벳인들의 생활방식의 핵심인 티벳불교의 방대한 자료를 보존하기 위해 200여개 이상의 사원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티벳 망명정부에는 14대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종교, 문화, 내무, 재정, 교육, 방위, 보건, 정보, 국제관계 등을 관할하는 행정부와 사법부로서 티벳 최고사법위원회가 있고, 입법부로서 티벳 국민대표의회는 지역과 종파를 대표하는 46명의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뉴델리, 뉴욕, 런던, 파리, 제네바, 부다페스트, 모스크바, 카트만두, 캔버라, 도쿄, 타이페이 등에 티베트 망명정부 대표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티벳역사 간단히 정리
체탕의 강포 리에 살던 신모(Sinmo,괴물)와 하늘에서 내려온 원숭이 형상을 한 아발로키테스와라(첸레지)가 결혼함으로써 탄생한 6명의 자식들이 티벳의 주요 6부족의 기원이 되었다고 전설은 전하고 있다.
원주민은 창족(羌) 또는 페족이라고도 부르는 티벳족이며, 언어는 티벳-버어마 어족에 속한다.
원래 그들 스스로는 페 또는 펜종(페족의 나라)이라 불렀다.
펜종을 중국은 투환(吐蕃)이라 불렀는데, 이 명칭이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되어 가면서 티벳가 되었다.
유목민이 모여살고 있는 지역은 비교적 지대가 낮고 기후가 온화하며 물과 풀이 풍부한 지역에 제한되어 있다.
B.C.127 녠트리 첸포, 얄룽(율부라강)왕국 건설
전설에 의하면, 녠트리 첸포는 사람들의 기도로 무탁이라 는 동아줄을 타고 얄룽계곡의 산으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12명의 지방족장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고, 치세가 끝나면 다시 무탁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첫 번째 7명의 왕은 허공에 걸린 마법의 사다리를 타고 그 땅을 다스리기 위해 내려왔으며, 죽을 때가 되면 다시 그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나 궁정 내부에서 모종의 갈등이 생기자 8번째 왕이 사다리가 매달린 밧줄을 끊어버렸다. 이후부터 티벳 왕들은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아내와 부장물들과 함께 거대한 무덤 속에 묻혔다.
얄룽왕조가 라사로 천도하면서 토번왕조가 되었다.
기원전 2세기에서 AD 9세기까지의 왕조이며, 마지막 왕인 랑 다르마 왕(836~841)은 44대가 된다.
AD 173 28대왕 라토토리 니엔첸, 최초로 불교와 접함.
제2장 통일왕조
6세기는 고원지대 전체가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된 시기였다. 통일로 인해 강력해진 티벳 민족은 고원지대 전체가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어갔다. 그리하여 중국, 몽골, 터키 인도 등에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7세기 초 송첸감포에 의해 군사적 대제국 완성.
608 隨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附國이라고 칭함.
609 吐谷琿 왕, 隨에 토벌 당해 하원유역으로 망명.
620 토욕혼과 통혼, 관위 12제를 발족, '吐蕃王國'을 성립.
618 불세출의 영웅 송첸감포 출생 (618~649)
송첸 감포 왕의 치적 : 33대왕. 광대해진 왕국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자 옛도읍지 얄룽계곡을 떠나 라사에 도읍지를 정하였다. 당시 라사는 호수가 많았는데, 호수를 메워서 도시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그는 씨족단위로 흩어져 살던 민족을 통일하고 영토를 확장시켜 마침내 당과 국경을 맞대고 정략결혼으로 당의 문성공주와 네팔의 브리쿠티 공주를 받아들여 제국을 안정시킴.
조캉과 라모체 사원 건립.
통일제국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보다 평화적이고 영적인 방향으로 티벳문화의 흐름을 바꾸고자 대승불교를 받아들임. 중국과 인도문명을 받아들여 토미 삼보다로 하여금 독특한 티벳문자(서장문자)를 제정토록 함.
당태종의 일격을 받은 적도 있으나 즉시 회복하여 더욱 강해졌고, 당 고종 때에는 청해지방을 점령하고, 안서4진을 함락시키고, 중국의 사천 감숙지방에도 진출함.
630 손첸 왕 즉위(13세). 4년 후 父王 죽이고 집권.
634 唐에 사신을 파견하여 공주와의 결혼을 요청함.
1차 요청에 대해 거절당하자 이에 당의 국경을 넘어 위협한 결과 당태종은 640년 청혼을 받아들여 종친 李道宗의 딸을 양녀로 삼아 토번에 보냈는데, 그 사이 신랑될 공첸왕자가 급사하자 송첸왕 자신이 대신 문성공주를 맞았다. 송첸왕은 이미 네팔공주를 비롯한 주위 나라의 4명의 공주와 혼인을 맺은 후였다.
635 伏允 당에 토벌 당해 멸망하고 토욕혼은 친당, 친티벳 2派로 분열.
638 토욕혼, 松州를 포위하고 당으로 하여금 공주의 출가를 허락케 함. 친티벳 토욕혼을 병합. 쿵송 공첸 왕 즉위.
640 문성공주, 쿵송 공첸 왕에게 시집가 캄의 쨔슈에 거처함.
643 쿵송 공첸 급사하고, 아버지인 손첸 왕이 재즉위, 네팔을 공략함.
646 문성공주, 당으로부터 불상을 가져와 라모체寺에 봉양하고 송첸 감포 왕과 재혼. 이때 문성공주가 가져온 조 린포체(초보불상, 12살의 석가모니 불상)는 지금도 조캉사원에 남아있다.
639~649 조캉사원(大昭寺)과 라모체사원(小昭寺) 건립
네팔에서 브리쿠티 공주(적존)를 받아들여 그녀의 원찰로서 네팔이 있는 서쪽에 조캉사원을 세우고, 그녀가 가지고 온 등신대의 금동 악쇼바불(선정불)을 안치함. 당태종의 왕녀 문성공주를 받아들여 조캉사원에서 북쪽으로 난 길 하나 건너에 라모체 사원 건립하고, 그녀가 가지고 온 석가상(초보불상)을 안치함.
원래 라모체 사원에 있던 조 린포체가 왜 지금 조캉 사원에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후일 금성공주에 의하여 조린포체가 옮겨졌다는 설과 중국 침입시 조캉사원을 지키려 바꿔놓았다는 설이 있다.
649 송첸 감포 왕 사망.
송첸감포왕은 티벳왕국을 통합하고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초석 위에 놓은 위업 때문에, 티벳인은 그를 자비의 보살이며 티벳의 수호신 첸레지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다.
654 군호와 민호를 나누어 군수조달대 제도를 발족함.
657 송첸의 둘째아들 친룽과 대신 카르둥첸이 선왕의 유업 받들어 당에 출정
659 唐, 친당 토곡훈연합과 티벳 간에 전쟁 발발.
당은 티벳군에 대항하기 위해 무위장군 소정방이 출정하였다.
(cf)백제멸망=660, 고구려멸망=660)
669 대비천 전투
당군을 청해호 남쪽의 대비천에서 격파하고 친당 토욕혼을 멸망시킴.
당고종은 "백포장군의 화살 하나에 천산이 평정되었네"라는 노래까지 달고 다니는 당 최고의 명장 설인귀를 출정시키면서 라사를 정복하고 토번왕조를 섬멸하도록 명령함.
토번왕조에서는 선조 때부터 명장인 친룽형제가 출전하여 당군을 참패시키고 대승을 거두었다.
티벳의 명장 친룽은 이 전투에서 설인귀를 생포하였지만, 친룽은 더 이상 티벳을 침공치 말라는 훈계를 하고 설인귀를 풀어주었다. 단신으로 당나라 조정에 돌아온 설인귀는 죄를 당고종에게 청하였으나 이전의 전공이 참작되어 죽음을 면했다. 그러나 모든 봉직은 몰수되고 평민으로 강등되어 백의종군하라는 황명을 받았다.
670 안서를 공격, 서역재패를 꿈꾸다.
672 당, 외조카 망룬 망첸 왕의 화의를 거절함.
678 승풍령 전투
당고종은 대비천에서의 패배에 대한 굴욕을 씻고자 이경현으로 하여금 18만의 병력을 주어 토번을 정벌토록 하였으나, 역시 친룽 형제에게 참패당하였다. 이때 고구려 유민 흑치상지도 당나라 군대에 속해있었다.
역사서엔 "주장이 도망해버리자 10만의 군사들은 병장기와 양초를 버리고 지리멸렬하여 퇴각해버렸는데, 오직 고려인 흑치상지만이 질서정연하게 퇴각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680 문성공주 사망.
698 공신 갈 족의 숙청 - 불세출 영웅들의 비참한 말로
3대에 걸쳐 토번왕조에 봉사하였던 송첸왕 시대의 명재상 카르둥첸의 5아들과 3차례의 환난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불세출의 명장 친룽은, 그들을 시기한 권신들에 의해 반역누명을 뒤집어쓰고 비참하게 죽어갔다.
친룽은 망명을 권하는 부하들의 간청을 뿌리치고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한 후 보검을 빼어 스스로 자결하였다. 그의 수백명 부하들도 그들의 대장과 조국에 대한 의리를 지켜 역시 자결하였다.
712 금성공주, 7세의 티벳 왕에게 시집 감. 당 중종은 종친 옹왕 수례의 딸(금성공주)을 토번왕 티데 주첸에게 출가시켰다.
717 금성공주, 당과 티벳 평화를 중재함.
734 청해남안의 적령에 경계비 건립(일월산, 도니다라). 티벳군 숨파兵의 도움으로 타시쿨한을 제압.
736 당은 이듬해 盟約을 어기고 티벳을 습격함.
739 금성공주 사망.
747 당의 '高仙之', 서티벳 원정하여 크게 이김.
752 남소카꾸라뽕, 토번왕과 의형제 맺음.
753 하서구곡의 땅을 탈환함.
754 티데쭉덴의 아들 티송데첸(적송덕찬) 탄생 (754~796)
제3장 티벳문화의 완성
8세기는 티벳제국의 전성기였고, 티송 데첸 왕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티송 데첸 왕은 토번왕국의 전성기를 이룩한 가장 위대한 군주이며, 안사의 대란 때 당으로 쳐들어가 장안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즉시 당의 반격을 받아 물러났지만, 하서 용우의 점령은 당말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불교를 일으켜 티벳에 오는 인도승이 많았다. 이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도인 스승이 파드마삼바바인데, 그는 티벳고유의 본교를 제압하고, 탄트라 불교를 일으켰다.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강성을 자랑하던 토번도 9세기 이후 차츰 쇠퇴하였다.
755 티송 데첸 38대 왕으로 즉위(14살). 이해 중국에서는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으며, 티벳에서는 숨파 정권이 실각한 해이기도 하다.
761 티송 데첸, 불교를 국교화하기로 결의.
763 티벳 점령 지역을 넓히고 10월에 장안을 침입하여 大赦를 베풀며, 개원하고 새 황제 광무왕을 즉위시킴.
당시 당은 안록산의 난으로 혼란 속에 있었다.
767 불교 도입 사절단을 당에 파견.
770 샨타락시타(적호) 입국. 파드마삼바바 초청됨
775 티벳 최초의 승원인 샴예 사원이 건설되기 시작함.
인도의 불교대학제도와 커리큘럼이 소개됨
779 샴예 대본당 완성.
샨타라크시타가 초대 승원장이 되었고, 샨타락시타와 12명의 인도승이 계사가 되어 금강계단을 설치한 후 7인의 티벳승려에게 보살계를 설하여 최초로 일곱 명의 티벳승려 탄생.
제신, 승불서약소서에 서명. 역경이 시작됨.
숭불조칙: 지금도 삼예사원의 법당 옆에 흥불맹서비가 서서 당시 티송 왕의 원력을 웅변하고 있다.
783 청수동맹(淸水同盟): 建中의 화평조약 체결.
감숙성 청수현에 있는 비문: 이 경계를 사이로 동쪽은 대당의 영토로 하고, 서쪽은 대토번의 영토로 한다. 이 경계의 양쪽에는 앞으로 더 이상의 적대적 침범과 전쟁이 없을 것이니, 중국 땅에서는 중국인이 행복하게 살고, 토번인은 티벳 땅에서 행복을 누리고 살 것이다.
786 돈황 함락시키고 중앙아시아의 패자가 됨. 남종선의 마하연 선사 티벳에 도착. 돈황이 다시 중국 땅이 된 것은 당 선종(848)때임. (70여 년 간 토번왕국이 점령함)
787 平凉의 위맹에 따라 당의 배신행위를 복수함.
791 황후 부로싸, 마하연의 신자로서 입도함.
794 삼예의 논쟁
중국선에 대항하여 마하연을 대적한 사람은 카말라실라인데, 그는 샨타락시타의 제자로서 나란다 대학의 중관계 교수이며 위대한 스승이었다. 샨타락시타가 인도에 귀국하지 않고 티벳에서 불교 전파에 힘쓰다 생을 마칠 때, 유언으로 삼예의 논쟁을 예언하고 그의 제자 카말라실라를 초빙할 것을 왕에게 당부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마하연을 도와 중국 선불교를 대변했던 티벳승려 상시(桑西)는 신라의 무상(684~762)과 무주(714~774)의 제자였다.
결국 삼예의 논쟁에서 패배한 마하연은 중국으로 강제로 추방당하였지만, 이미 뿌리를 내린 중국선 추종자들의 반발은 거세었다. 카말라실라가 암살당한 것도 이러한 반발의 여파였지 않을까?
796 티송 데첸 왕 퇴위, 다음 해 사망. 카말라실라 살해됨.
803 세나레끄, 정식에 등극하여 티데 송첸왕이 됨.
804 취경사절단이 당에 파견되고, 이 무렵 갈첸숭불서약에 제신 서명함.
815 티데 송첸왕 사망.
817 뒤를 이어 티 랄파첸 왕 즉위 (817~836)
티 랄파첸 왕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역경기구 설립하여 불교문헌의 번역을 완수한 것
822 당과 티벳 평화조약 맺고 다음해 회맹비 건립.
티 랄파첸왕은 중국과 평화조약(821~822)을 맺었으며, 그 조약문이 라사에 있는 기둥에 새겨져 있다. 티벳에선 송첸감포, 티송 데첸, 티 랄파첸은 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824 최고 역경 목록(덴카르마)성립.
830 티벳 특유의 의학체계 성립
티송 데첸 왕이 시작한 전 아시아지역에서의 학술도입사업은 불교연구는 물론이고, 수학·약물학·시·예술·정치학·조각 등 다방면의 학문이 발발했다. 페르시아·인도·위굴·몽골·중국의 당나라·실크로드 주변의 여러 도시국가 등으로부터 학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가르침을 비교하고 조화시키는 기술을 습득하였는데, 830년대에 완성된 의학체계는 이러한 학문적 집적의 성과이다.
즉, 세계각처에서 수백 명의 학자를 초청한 다음 그들에게 10년동안 인도·중국·페르시아·몽골·위굴의 의학체계를 비교하고 연구하도록 하였고, 그 결과로 건강에 관련된 불교의 영적인 가르침에 더하여 심리학·해부학·신경생리학·외과의학·식물학·화학·영양학 등이 종합된 티벳 특유의 의학이 성립한 것이다.
제4장 암흑시대-통일왕국의 분열
삼예가 종교적 중심지가 된 이후, 티송 데첸의 후계자들은 삶 전체를 불교화할 것을 강요했다.
강요의 도가 지나쳤던 까닭에 왕족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다.
암살과 반란이 계속되면서 통일왕조는 몰락의 길을 걸었고, 급기야는 사분오열 되고 말았다.
불교탄압도 있었지만, 1세기도 지나기 전에 불교의 가르침과 제도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지방호족들의 보호아래 불교는 백성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841 다르마 왕 즉위.
티 랄파첸 왕은 학문적으로 놀라운 업적을 쌓았지만, 불행하게도 암살을 당하는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삶 전체를 불교화할 것으로 강요한 데서 온 비극이었다.
송첸과 티송 왕은 불교를 티벳의 전통적 종교와 실용적으로 조화시키는 유화적인 태도로써 전파시켰는데 반해, 티 랄파첸 왕은 상류계급에서 천민에 이르는 모든 백성들에게 불교계율을 지키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 강압적 정책이 강한 반발을 일으켜, 결국 왕은 고립되어 암살 당하였다.
왕의 반대파들은 곧 랄파첸 왕의 형인 랑 다르마를 새 군주로 추대했다.
이후 토번왕조는 몰락의 길을 내리 걷는다.
842 다르마 왕 살해됨. 다음해 왕조가 남북으로 나뉘어 불교의 국가통제를 잃음.
무능력하였던 다르마 왕은 반불교도들인 본교 귀족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귀족세력들은 불교사원들을 폐허로 만들고, 불교경전을 불살랐다.
외국인 승려들은 쫓겨났으며, 티벳승려들은 속인으로 환속 당하였다.
불교는 티벳 전역에서 철저히 억압받았고, 본교가 다시 전면에 등장하였다.
펠키 도르제라는 한 불교도가 랑 다르마 왕을 살해하고 난 후, 그의 후인(後人)들끼리 서로 오랫동안 분쟁하다가 결국 티벳을 분할해 가졌다.
이후 티벳 전체를 통치하는 통일왕조가 다시는 역사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850 바 氏 쿤셸크 반란(反亂), 외척 부로 氏 진진 군을 하서에서 물리치고 당에 들어옴.
877 얄룬에 있는 토번왕가의 분묘가 황량해짐.
제5장 중흥시대
958 대역경승 린첸 상포 태어남.
978 중앙티벳에 승가가 부활됨
1008 토번왕의 후예인 티데, 청해에 초빙되어 게세佛子로 불림.
1012 마르파 탄생(1012~1098)
마르파는 카규파의 창시자인데, 그 유명한 밀라레파의 스승이기도 하다.
남인도의 로닥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역경승인 독미로부터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난 후, 불교의 가르침을 완성하겠다는 열정으로 소유물을 팔아 인도로 가서 당시 가장 유명한 금강승의 스승, 나로파의 제자가 되었다.
마르빠의 제자가 밀라레빠(1040~1123)이며, 현재 달라이 라마의 겔룩파에 이어 티벳 제2의 교단세력을 가진 카규파의 전통은 밀라레파의 제자 감포파에 계속 이어진다. 그러므로 카규파의 3대 조사는 마르파, 밀라레파, 감포파라고 할 수 있다.
1028 서하, 량주. 감숙을 점령.
1032 이 무렵 게세불자, 청당왕국을 청해에 세움.
1040 밀라레파 탄생(1052~1135)
1042 아티샤, 서부 티벳에 도착, 3년 후 중앙티벳으로 초빙됨.
1056 돔툰, 라덴寺를 건립. 카담派 성립.
1073 상프 대승원이 중앙티벳에 건립되고 사캬派가 짠에서 성립됨.
사캬파는 화교라고도 불리는데, 삼색문양 때문이다. 회색(금강호법신)바탕에 백색(관음)·문수(적색)의 띠가 있다. 토번왕국의 전성기인 8세기 이후 왕족들의 분열과 뵌교와의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사분 오열된 티벳의 전 국토가 오랜 암흑기에 들어갔는데, 11세기에 이르러 라사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의 중앙티벳에서 쿤(곤)이라는 토호족이 민족중흥의 기치를 내걸고 기존종파인 닝마파· 카규파와는 다른 새로운 종파를 설립했다.
1121 감뽀에 승원 건립. 카규派 성립.
1158 파크모두派, 테르에 승원을 건립함.
1159 카르마 두숨 켄파(제1대 카르마파 린포체), 추프에 도착하여 사원 건립함. 카르마파는 카규파에서 갈라져 나온 파이다. 카르마 두슘켄파는 열반에 즈음하여 그의 환생을 예언하였고, 이후 발견된 轉生자가 제2대 카르마파가 되어 추푸사에 모셔져왔다. 튈쿠(Tulku) 즉 활불(living Buddha)의 효시가 됨.
제2대 카르마파는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에게 초빙되어 검은 모자를 하사 받았는데, 그래서 이후 카규파를 흑모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13세기와 14세기: 몽골제국이 유라시아일대를 통일하여 티벳도 대몽골제국의 관할권 아래 들어갔다. 하지만 티벳인들의 삶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티벳은 이미 13개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져있었고, 각 지역은 지방귀족과 사원이 협력하여 다스리고 있었다.
1182 사캬 판디타(쿵갸 걀첸) 탄생(1182~1253)
샤카파의 영적이고 동시에 세속적인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으며, 지금도 사캬 판디타로 불린다. 그것은 당시 세력이 커지던 몽고와 굳건한 외교관계를 유지한 덕분이었다.
사캬 판디타가 최초로 티벳불교를 몽고에 전한 이래, 1920년대까지는 문화적 세력으로 완전히 뿌리박았다.
원나라에 가서 몽고문자를 만든 파스파(1235~1280)는 사캬 판디타의 조카이다.
1204 샤카 슈리바드라, 티벳에 도착.
1239 몽고 고단칸의 軍, 겔라칸을 불태움.
징기스칸의 손자이며 오고타이 칸의 둘째아들 쿠덴은 동부티벳의 요충지 참도우(창도)를 함락시키고 티벳에 밀려들어왔다. 당나라에게도 짓밟히지 않았던 티벳은 처음으로 몽고군에게 점령당하였다. 그러나 파크모두파의 외교적 노력으로 티벳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몽고군을 철수시켰지만, 몽고는 화친사절단의 파견을 강화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에 티벳왕국의 연합세력은 사캬파의 판디타를 추천하여 서량에 파견하였다.
1244 샤카 판디타는 조카 파스파(八思巴)와 함께, 티벳 대표로 西凉에 이르름.
1251 몽케칸 즉위.
1256 카르마 팍시, 몽케 칸의 라마가 됨.
1260 쿠빌라이칸 즉위. 사캬 파스파는 그의 國師가 됨.
이를 계기로 티벳불교는 원의 국교가 되었다. 쿠빌라이 칸은 사캬파와 콘 가문에게 티벳의 통치권을 주었다. 사캬 판디타와 팍파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원나라는 군대를 파견해 사캬파의 정적이었던 디궁 카규파를 비롯한 군소 종파를 토벌하고, 전 티벳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사캬파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몽고군의 위력을 등에 업은 사캬파는 회색의 땅 사캬사원을 중심으로 전 티벳의 종교를 장악하여 백여년이나 설역고원을 통치하게 되었다.
사캬파는 정치적인 세력보다는 영적인 지도력을 발휘하는데 더 많은 힘을 쏟았다.
1267 크레그, 디군派에 施物을 줌.
1270 파스파, 원 제국 황제의 스승(帝師)이 됨.
파스파 국사가 8년간이나 원나라에 머물다 티벳고향으로 돌아오자 원의 세조 쿠빌라이 칸은 그에게 "사캬 법왕"이라는 칭호와 함께 13만의 봉족을 주면서 티벳전역의 통치권을 주었는데, 지금의 법왕제도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고향 사캬에 도읍을 정한 파스파 법왕은 민족의 종일에 힘쓰는 한편 문치에도 힘을 기울여 티벳은 다시 한번 불교문화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원나라가 쇠잔해지자 사캬파도 쇠잔해져 겔룩파에게 주도권을 넘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게 된다.
1277 쿠빌라이 칸 남티벳을 공략함.
1280 파스파 사망.
1290 쿠빌라이 軍, 디군 대승원을 파괴함. 부통 태어남.
1322 챵츄프 겔쩨(遁), 파크모두派의 라푼(管領)이 됨.
1334 텐규르 샤르 사본 성립.
1349 파크모두派, 사캬派를 대신하여 짠 지방 제압함.
1354 창츄프 겔쩨(遁), 원의 사도가 되어 티벳을 지배함.
1357 총카파, 티벳의 암도 지방(청해)에서 태어남.
총카파는 훗날 겔룩파의 교조로 추앙되어 법당에는 석가모니상과 나란히 안치되어있을 정도로 대우된다.
1362 텐규르 총게 본 성립.
1364 부통 사망.
제6장 종교개혁시대
(15세기의 위대한 스승 총카파)
14세기가 끝나갈 무렵 몽고제국의 세력이 약화되자, 토착 파크모두 왕조가 일어나 티벳통치를 자임했다. 이즈음에 총카파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1373 총카파, 중앙티벳에 진출.
1406 파크모두派, 明으로부터 闡化王이라는 칭호를 받음.
1409 총카파, 간덴 대승원 건립하고 초대 원장이 됨.
겔룩派를 창설. 라사 대기원법회 비롯됨.
총카파는 수도 라사에서 범민족적인 종교축제를 열어 불교수행에 헌신하는 새시대의 막을 열었다.
정초의 몬람 축제(기도 축제)는 21일간이나 계속되는데, 14대 달라이라마가 포탈라에 주석할 때만 해도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몬람은 기도`기원이라는 뜻으로 국태민안·법왕의 장수·불교의 융성·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법회이다.
몬람 축제는 조캉을 도는 코라를 법왕이 먼저 한 다음, 조캉의 대법당에서 시작하는 법회는 라사의 삼대사원(간덴, 세라, 데풍)의 전 승려와 전 라마권의 승려들이 참가하는 티벳 최대규모의 축제였다.
총카파로부터 시작된 이 범국민적 축제는 1960년 티벳정부가 인도로 망명할 때까지 티벳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연중행사로 치러졌다.
축제기간동안에는 일상적인 모든 일이 중지되고 ,사원장들이 국민들의 모든 일을 책임진다.
조캉사원에서 열리는 또 하나의 축제는 4월의 샤카다와 축제이다. 샤카는 28숙 별자리를 뜻하고, 다와는 달(월)의 의미이다. 세존이 4월 보름에 사자별자리에서 태어났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말띠 해의 행사는 특별히 더 성대한 축제가 벌어진다.
1410 永樂版 캉규르 開版.
1416 드레풍 대사원 건립. 드레풍 사원은 라사에서 서북쪽으로 4Km의 거리에 있으며, 총카파의 제자 잠양초제가 건립하였다.
1419 세라 대사원 건립. 총카파 사망.
간덴, 드레풍, 세라의 세 사원은 대학역할도 병행하며, 겔룩파의 중핵을 이루고 있다.
티벳인들은 총카파를 제 린포체(Je Rinpoche, 소중한 스승)라고 부른다.
총카파가 일으킨 종교개혁운동은 15세기와 16세기에 이르러 꽃을 피운다.
총카파에 의하여 티벳인들은 영적·사회적`현실적인 삶 전체가 변화되었다. 각 지역에서 사원의 영향력이 커졌고, 인생전체를 포기하고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는 남녀구도자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사회적 분위기도 점점 더 평화로운 쪽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군인이 점점 줄어들어 지방호족을 호위하는 몇사람 정도만 남게 디었던 것이다.
총카파의 조카이자 제자였던 겐둔 드루파가 겔룩파를 계속 이끌어갔는데, 그가 바로 제1대 달라이 라마가 된다.
* 라사의 3대사원:간덴(감단사,총카파)·데풍(철방사)·세라(색랍사)
* 겔룩파의 6대사원: 라사의 3대사원 + 타르사(청해성 서닝(서령))·타시룬포(시가체)·라부랑스(감숙성 시하어(하하)
* 포탈라궁 직영 원찰 : 죠캉·라모체.
라사 북쪽 근교엔 레팅 린포체(2000년 현재 7대, 3세 소년)의 레팅사원이 있다. 17대 카르마파의 중국탈출(1999.12.28)에 중국이 그 빈자리를 메꾸려 레팅 린포체를 임명했다.
1429 샤카派, 코르 에왐 대승원 건립.
1434 파크모두派 상게 겔첸, 린푼파에게 연금당함.
1447 총카파의 조카이자 제자인 겐둔 드루파( 1391~1474, 제1대 달라이 라마),타시룬포 대사원을 지방호족의 도움으로 건립함.이후 겔룩파(황모파)의 본거지가 됨. 데르게 룬둡텐 寺(데르게 印刷寺) 건립.
훗날 5대 달라이 라마가 라사에 도읍을 정하고, 그 스승이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타시룬포사원에서 환생하였다고 인정하면서 판첸(반선)라마 제도가 시작됨. 이후 시가체는 티벳 제2의 도시가 됨.
겐둔 드루파가 건립한 창 지방의 타시룬포 사원은 후에 판첸 라마의 거처가 되었는데, 최초의 1대 판첸라마는 제4대, 제5대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었다. 판첸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믿어진다.
1454 카쿠카 왕츄크, 파크모두파 테르 승원장이 됨.
1458 카쿠키 왕츄크, 테르 승원장의 자리를 빼앗김(~73).
1474 겐둔 드루파 죽음
겐둔 드루빠는 오랜세월동안 영감이 넘치는 가르침을 베풀고 글도 많이 남겼다. 여기 저기 사원도 많이 건립했다.
1475 겐둔 드루빠가 죽은 다음 태어나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자마자 자기가 겐둔 드루빠라고 주장하는 어린아이가 나타났다. 이 아이는 겐둔 드루빠가 살던 동네와는 다른 지역에서 태어났는데, 여러가지 시험을 거치고 상서로운 징조들을 종합한 결과 위대한 스승 겐둔 드루빠의 환생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충분한 교육을 받은 다음, 겐둔 갸초라는 이름으로 겔룩파를 이끄는 영적인 스승이 되었다.(갤룩파 화신의 시조)
1480 린푼파 툰유 도르제, 키슈를 침략.
1491 카쿠키 왕츄크 사망. 린푼파, 콘살을 점령.
1493 카르마 홍모파 츄타크 예셰, 파크모두파 테르 승원장이 됨.
1498 린푼파, 대군을 이끌고 키슈에 진출함. 이 해부터 라사의 대기원법회에서 겔룩派를 따돌리고 카르마파가 주도함.
1512 툰유 도르제 사망하고 린푼파 쇠약해짐. 겐둔 갸초(2대 달라이 라마), 타시룬포에 住寺함.
1516 린푼파와 파크모두파가 다투자 홍모파 츄타크 예셰가 중재함.
1517 파크모두파軍, 짠의 강쩨를 제압. 겐둔 갸초, 데푼 대승원에 초대 됨.
1518 겔룩派, 라싸 대기원법회를 다시 주최하게 됨.
1530 간덴궁전(데풍사 내)
간덴 사원은 제2대 달라이 라마에 의해 세워진 이래 "위대한 5대"가 포탈라궁을 중건하여 국내를 통일하기까지(2대~5대) 달라이 라마의 궁전이 되었다. 문화혁명때 막대한 피해를 입어 아직도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채 상당부분이 폐허로 남아있다.
1537 디군派, 곤뽀의 병력을 움직여 겔룩派 18寺를 개종함.
1544 소남 갓쵸, 겐둔 갸쵸(2대 달라이 라마)의 화신으로 지정되어 3대 달라이 라마가 됨. 2년 후 데풍사원에 들어감.
1565 신샥파 쩨텐 도르제, 시가체를 장악.
1570 탁룬派, 디군派와 결별하고 겔룩派 계통에 동조.
1575 신샥파, 키슈를 침략.
1573 소남 갸초, 청해에서 몽고황제 알타칸을 만나 달라이 라마의 칭호를 받음(3대 달라이 라마)
몽고 포교 개시.
소남 갸초가 몽골을 방문했을 때, 몽골황제 알탄 칸은 그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선사했다. 덜라이 라마라는 칭호는 이렇게 소남 갸초가 처음 들은 호칭이지만, 티벳사람들은 그의 앞선 두 전생의 뒤를 이은 3대 달라이 라마로 여기고 있다.
1588 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갸쵸, 몽고인에게 살해됨.
1589 알타칸의 조카의 아들인 욘텐 갸초 출생. 후에 소남 갸초의 화신으로 지정됨.
4대 달라이라마 욘텐 갸초시대에 세속의 통치자들은 지속적으로 확산되던 종교부흥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너나 할 것 없이 승려가 되려고 나섰고,너무 많은 시간과 돈이 종교의식에 들어가는데 대한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17세기에 들어서서는 티벳고원 전체가 흔드는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시대의 북유럽이나 중국·일본처럼 군사 독재자가 나타나 종교중심의 영적인 삶을 산산조각내 버리느냐, 아니면 세 속의 무기를 내려놓고 영적인 진화의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냐는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1603 몽고인 4대 달라이 라마 욘텐 갸초, 티벳에 도착.
1605 카르마派, 신샥파로 하여금 겔룩派 시주승을 습격케 함.
1606 북경판 캉규르 재판됨.
1612 신샥파, 국내를 통일함.
1616 욘텐 갸초 죽고 신샥파, 우 지방의 네우존을 공략함. 부탄에 투크派 계통의 나라가 세워짐.
제8장 달라이 라마의 시대 개막
1617 제5대 달라이 라마, 롭상 갸초 태어남 (1617~1682).
1618 신샥파, 데풍`세라 사원 등 2대 대사원을 침략.
1621 청해의 드론 투메르 軍, 라싸의 칸 타칸에서 신샥派 軍을 무찌르자 1대 판첸 라마가 중재.
1623 쟝版 캉규르, 카르마파의 지도 아래 개판됨.
1624 예수會의 안드라데 神父, 짜프란에 들어와 구게 왕 만남.
1628 예수會의 카브랄. 카셀라 신부, 짠 왕 카르마 텐콘 왕뽀를 만남.
1630 카셀라, 시가체에서 피살됨. 카브랄 전도를 방기함.
1632 하르하 촉투칸, 청해지방을 제압함.
1634 겔룩파 지지하는 투메르, 린데칸에게 오르도스를 제압 당함.
1635 촉투칸, 알사란을 파견하여 겔룩파를 습격하려 했지만 회유 당함. 겔룩派, 구시칸과 동맹관계를 수립.
1636 구시칸, 촉투칸을 청해에서 무찌름.
1640 예즈스會, 짜프란의 전도를 방기하게 함.
1641 구시칸, 겔룩파에 요청하여 짠군을 공격.
1642 짠 왕 카르마 텐콘 멸망당하고, 달라이 라마 정권이 성립함(첫 번째의 법왕).
덜라이 라마의 정권을 세운 롭상 갸초는 "위대한 5대"라 불린다. 시킴 정권 성립.
조캉사원이 건립된 지 1000년이 지난 후, 롭상 갸초는 간덴궁이 설립되고 티벳왕으로 즉위하였다.
8세기 이후 처음으로 티벳을 통일했으며, 중앙정부를 강화했다.
티벳사람들은 그 이후 오늘날까지 법왕 달라이 라마가 통치하는 간덴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여긴다.
티벳사람들이 위대한 5대라 부르는 이 첫 번째 법왕은 티벳의 사회적 특성에 적합한 독특한 정치제도를 만들었다. 그는 사원과 비폭력이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체제를 구축했으며, 사실상 귀족집단을 없애버렸다. 귀족들이 세습적으로 물려오던 토지를 몰수하고, 간덴정부에서 일한 만큼 받는 보수로 살아가게 했다. 귀족들은 더 이상 사병들을 거느릴 수 없었다. 봉건영주로서 소작농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던 그 당당하던 세력들이 관세음보살의 화신에 의해 완전히 날개가 꺾여버린 것이다. 당시 티벳의 소작 농민들은 중세유럽이나 러시아의 농노들처럼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1644 달라이라마 정권, 부탄을 공격함.
이때 청나라(한반도 북부에서 일어난 퉁구스족)가 명나라가 멸망한 틈을 타 중국내륙으로 진출함.
1645 포탈라궁 건립되기 시작(백궁은 1648년에 완성). 총 13층, 높이 110미터,동서 360미터.
백궁(아래쪽)은 정부청사이고, 홍궁(위쪽)은 사원.
포탈라의 동쪽에 조캉사원과 라모첸 사원이 있고, 서쪽에 여름궁전 노블링카(7대가 1751년 완성)궁전이 있다. 동북에 세라사원, 서북에 데풍사원, 데풍사원에서 라사 쪽으로 도보 10여분 거리에 내충신탁이 있다.
1651 달라이 라마 5세, 북경 방문(다음해 귀국).
만주족인 청나라가 아시아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했을 때, 티벳은 그들과 우호관계를 맺어 국가적인 독립성과 동질성 유지를 보장받았다.
청황제 순치제(세조)는 위대한 5대와 동맹을 맺고 티벳의 독립성을 보장해줌.( 청의 가장 강력한 적수가 몽고제국이었는데, 명나라가 멸망한 틈을 타 중국 대륙에 진출하는데 있어 가장 걸림돌이 바로 몽골족이었던 것이다. 달라이 라마가 몽고에서 권위있는 존재였으므로 청으로서는 달라이 라마의 도움이 필요했었다.)
나아가 청은 온 세계의 영적 지도자이자 진리의 수호자로서 달라이 라마를 떠받들었고, 달라이 라마도 청나라 황제를 만주와 중국의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해주었다.
달라이 라마는 몽골의 불교를 육성시켜 불교사회로 만들고, 청나라 황제는 무장을 해제한 불교사회를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는 약속이 티벳과 청이 맺은 동맹의 밑바닥에 깔려있었다.
티벳이 거칠기로 소문난 무력국가인 몽골을 평화로운 나라로 만든 것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거의 없는 가선으로서, 주목할 만한 사회변혁의 예이다. 그러나 천년동안 티벳 스스로가 경험한 변화에 비하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1654 구시칸 사망.
1656 달라이 라마 정권의 창설의 섭정인 소남 라프텐 사망.
1659 5대 달라이 라마, 포탈라궁에 상주하기 시작함.
1661 구류벨과 도르빌, 청해로부터 라싸에 이르러 네팔로 나옴.
1662 1대 판첸 라마 사망.
1666 오이라트의 갈당, 티벳으로부터 귀국.
1673 吳三圭, 운남을 등지고 다음해 달라이 라마 5세의 휘하에 사자로 들어감.
1678 갈당, 달라이 라마 5세로부터 보쇽투칸이라는 칭호를 받음.
1679 상게 갸초, 섭정이 됨(27세)
1682 달라이 라마 5세 사망. 섭정이 그의 죽음을 1696년까지 비밀로 함.
이로서 달라이 라마가 죽고 난 후의 통치는 섭정 데시 상게 갸초가 맡게 되었고, 그 다음 달라이 라마에게 넘겨지며, 티벳 사회는 티벳인의 정신적 물질적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회구조 형태를 만들어가기 시작함.
1668 갈당, 하르하의 여러 두목을 토벌.
1690 강희제, 갈당을 토벌. 포탈라궁의 홍궁 定礎.
1691 달라이 라마 5세의 영묘를 포함한 포탈라 홍궁 건립되기 시작함.
1693 영묘 완성. 이듬해로부터 소기원 법회 시작.
1695 5대 달라이 라마의 시체를 영탑에 봉납함. 홍궁 완성.
1696 갈당 근절당함. 5대 달라이 라마의 죽음을 밝히고 6대 등극
1702 6대 달라이 라마 환속함.
1705 라상칸, 청해로 추방된 뒤 반전하여 상게 갸초를 피살하고 티벳 왕위에 오름.
1706 6대 달라이 라마, 청에 납치되는 도중 청해 남쪽 쿵카 노르호반에서 사망.
1708 7대 달라이 라마, 캄의 리탄에서 출생. 카프첸派 수도사, 라싸에 들어옴.
1709 쟘안 세파, 청해에 타시킬 대승원을 창건함.
1715 7대 달라이 라마, 쿰붐 대승원으로부터 보호받음.
1716 데시데리. 후레야 등 두 신부, 라다크에서 라싸에 이르고, 후레야는 인도로 감.
1717 쥰가르軍, 라사에서 라상칸을 피살함.
1720 청, 7대 달라이 라마를 공인하고, 군과 함께 7대를 라싸로 보내 쥰가르軍을 내쫓은 뒤 캉체네 정부를 수립함. 북경판 텐규르 개판됨.
1721 데시데리 신부, 라싸를 떠나 이듬해 인도에 도착.
1723 청군, 라싸를 철퇴함. 청해에서 로쌍 텐징의 난을 평정하고 직할지로 함.
1726 청, 캉체네에게 닝마파 탄압을 명함.
1727 캉체네가 피살되자 포라네가 병력을 일으켜 청에 통보함.
쉬투가 캄에 페르푼 사(인쇄소)를 건립함.
1728 청군 도착하여 반란의 주범 3대신을 처형하고, 7대 달라이 라마는 사천 갈타르에 보내짐. 판첸 라마, 짠의 통치권을 인정받음. 오란다人 반 데 푸테, 라싸에 도착.
1731 쵸텐版 캉규르 개관.
1732 나르탕版 캉규르, 셰르칼에서 개판.
1733 데르게판 캉규르 개판(1730~1734 완성식).
1735 창캬 룰페 도르제, 청의 인인 대라마에 임명됨.
1740 포라네 군주에 임명됨.
1742 나르탕판 텐규르 개판(1741~). 카프첸 파, 라싸의 전도를 방기. 데르게판 텐규르 개판(1737~1744 완성식).
1747 포라네 죽자 둘째 아들 달라이 파툴 규르메 남겔이 계승하여 독립정책을 취함.
1750 주 티벳대신, 규르메 남겔을 죽이고 그 부하에게 피살됨. 7대 달라이 라마가 사건을 진압함.
1751 청군 도착, 달라이 라마 정권의 재출발을 인정함.
1759 게오르기 著 "티벳의 아르하베트" 출판됨.
1760 쵸네 版 텐규르 개판(일설에는).
1769 굴카, 네팔을 지배.
1774 보굴, 헤밀턴과 함께 타시룬포 대승원을 방문하여 3대 판첸 라마를 만남.
1779 3대 판첸 라마, 북경 방문(이듬해 사망).
1783 타나, 산다와 함께 타시룬포 대승원 방문.
1788 굴카, 티벳 공략. 이듬해 청군이 이르지만 굴카에 굴복됨.
1791 굴카, 재차 티벳에 침입. 타시룬포를 침략함.
1792 티벳軍, 굴카를 키룬, 냐낭까지 반격. 청군이 이르자 대승리함.
1793 金甁制전에 의한 고위활불 선정의 규제가 부과됨.
1798 고파 탄트라집, 데르게에서 개판됨.
1804 8대 달라이 라마 사망. 이후 달라이 라마의 千折이 계속됨.
1822 쵸마 드 게레스, 무아크로후트와 함께 레에 이르름.
1826 슈레타의 <<티벳어사전>> 출판됨.
1842 청의 원조 없이 드쿠라 전쟁의 강화가 이루어짐.
1855 11대 달라이 라마 등극. 명대직 라덴 活佛 퇴위. 11개월 후 달라이 라마 죽고, 명대직 라덴 활불 복위. 굴카전쟁 일어남.
1856 굴카전쟁의 강화 성립.
1858 12대 달라이 라마 선출. 명대직 라덴 활불과 셰다와 전쟁 일으킴.
1862 셰다와, 쿠데타에 의해 섭정이 됨.
1863 셰다와, 프룬와를 파견하여 데르게에 침입한 냐론의 궁뽀 남겔을 물리침.
1864 셰다와 사망.
1871 펜덴 툽둡, 12대 달라이 라마 죽고, 콘데린사원 타짝활불인 츄키 겔첸, 명대직이 됨.
1876 청, 영국과 조약체결.
1877 13대 달라이 라마 선출.
1878 기셴 신, 라싸에 들어옴.
1881 사르트 챤드라 다스, 티벳에 들어옴.
1885 카왕 로상 도르제, 데풍 대승원에 들어옴.
1886 텐게린사원 테모활불 틴레 랍게 명대직이 됨.
1890 영국, 청에 시킴 조약을 맺게 하고 3년 후 통상조약을 덧붙임.
1895 13대 달라이 라마 친정( 親政).
1898 카존, 인도 총독이 됨.
1900 13대 달라이 라마의 특사 드르제흐, 러시아 황제를 알현함.
1903 얀그하즈반드의 무장사절단, 티벳의 칸바존에 이르름.
1904 13대 달라이 라마, 외몽고로 망명함. 얀그하즈반드, 포탈라궁에서 라싸조약을 체결함.
1905 파탄사건의 발생으로 鳳全 피살됨. 趙爾豊, 캄 지방의 장악을 기도하기 시작함.
6대 판첸 라마, 영국의 인도 정부를 방문함.
1906 영청 서장조약 성립. 종주권 회복운동 진행.
1907 13대 달라이 라마, 라싸로 돌아오지 않고 연말에 북경으로 향함.
1908 영청통상조약 체결. 록힐. 大谷尊柳. 寺本婉雅 등 오태산에서 13대 달라이 라마를 만나서, 서태후 사후 연말에 달라이 라마의 귀국길에 함께 동행. 달라이 라마, 서태후를 만남.
1909 13대 달라이 라마, 포탈라에 도착.
1910 13대 달라이 라마, 인도로 망명.
1911 6대 판첸 라마, 라싸에 초청되어 청군에 협력.
신해혁명(辛亥革命) 일어나 만주국(청) 멸망하고 중화민국 성립.
1913 13대 달라이 라마, 라싸로 돌아옴.청나라 군대를 내쫓고 티벳 독립 선언. 몽장조약 체결. 5개조선언 포고. 싱라 회의 개최.
1914 영국 티벳간에 싱라조약 조인.
1917 티벳軍, 챰드를 사천군으로부터 탈환.
1923 6대 판첸 라마, 티벳을 탈출 (2년 후 북경 도착).
1927 쟝제스(장개석), 티벳에 통합 참가를 명령함.
1930 티벳군, 사천군`서녕군과 싸움 시작.
1932 티벳군, 챰드까지 진격 당해 금사강 이동을 잃고 이듬해 양군과 강화.
1933 13대 달라이 라마 열반.
13대 달라이 라마는 1911년 만주 군대가 티벳에서 완전히 퇴각한 때부터 1949년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침략해 올 때까지 약 40년간 티벳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지켜왔으며, 티벳은 완전 독립을 누려왔다.
1934 라싸版 컁그류 개판. 라싸 정부, 중화민국연락관에게 주재를 인정.
1935 7.6. 14대, 티벳북동부 암도지역의 탁스터라는 작은 마을의 농가에서 태어남. 이름은 라모 돈드루프
1936 14대 달라이 라마를 찾기 위해 라모이 라초 호수에서 섭정이 본 비전을 찾아 3개 탐색팀이 라사에서 출발함
1937 6대 판첸 라마, 캄의 제쿤두에서 사망.
탐색팀에 의해 14대 달라이 라마 환생발견. 모슬렘 군벌이 아이를 데리고 라사로 돌아가려면 보상금을 내라고 요구하자, 티벳 정부는 은으로 30만달러의 돈을 지불함.
1939 암도(청해) 출신의 14대 달라이 라마, 8월에서 9월까지 육로를 이용하여 라사로 여행함.
제9장 달라이 라마와 티벳의 시련
1940 봄(2.22.)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로 등극(5살)하여, 이신노르부 또는 걀와 린포체라 불림. 섭정이 정치적 문제들을 대행하는 동안, 의식적인 임무를 수행함
1941 14대, 집중적인 종교교육 시작
1943 영국이 티벳의 자율권을 재확인함. 티벳은 제2차세계대전동안 내내 중립을 지킴.
라싸 주재 님국주재관, 증원을 받아들임.
1945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947 인도 독립. 티벳 통상사절단, 각국에 파견.
1949 중국공산당, 중국 본토를 장악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10.1). 전략적 요충지인 티벳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티벳 해방선언. 해방군 티벳 동부에 진주하여 서녕을 장악.
국민당이 승인한 7대 판첸 라마를 추인. 14대 달라이 라마, 야툰으로 도망하여 국제연맹에 제소하지만 인정받지 못함.
1949.11.4 도도라 린포체, UPI통신으로 티벳이 독립국임을 선언
1950 중국의 주덕장군, 티벳에서의 제국주의 세력 척결을 주장(1.31). 티벳 침략(10.7). 중국군의 침략으로 인하여 정식 등극 예정일보다 3년 전에 정신적`세속적 지도자의 절대적 대권을 수여받음.
인도정부는 평화적 해결을 요구했고(10.25), 중국은 내정간섭이라 반박하며 인도의 요구를 묵살함.
10.27. 국제연합에 호소했으나 거부당함. 서장 티벳족 자치구 인민정부 수립(11월, 인구 70만) . 12.9. 중국군을 피해 한겨울에 라사에서 출발하여, 육로를 이용하여 히말라야를 넘어서 인도 국경의 마을로 피신함.
1951 달라이 라마 부재 중에 카프파 등의 티벳 대표, 북경에 도착하여 "티벳의 평화해방"을 위해 중국이 제정한 17개 합의안에 조인되었으나, 이는 강요에 의한 것임.
달라이 라마는 티벳 국민의 종교적`개인적 자유를 보장받은 후 야툰으로부터 라사로 돌아옴.
인민해방군, 라싸에 진격해 들어옴.(이후 8년 동안 인민 해방군과 긴장된 공존관계 유지)
14대, 드로모와 갼체에서 관세음보살 관정을 내림.
1954 라사에서 칼라차크라 가르침을 지도함(여름별궁 노블링카 궁전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단계(차제도론)에 대한 가르침 내림).
달라이 라마와 7대 판첸 라마는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뚱(모택동), 조우엔라이(주은래),덩샤오핑(등소평)을 포함한 중국 지도층과 만남 (제1회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출석)
또한 흐루시초프, 불가닌, 네루를 만남. 라사에서 티벳어로 쓴 "자비에 관한 명상"발간
1955 14대 달라이 라마, 서장자치구 수비위원회 설립 승인. 공산개혁에 저항하는 반란이 캄과 암도에서 일어 남.
1956 서장자치구 수비위원회 발족.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 인도 2500회 부처님 오신날(불탄 2500년祭;쟈안티 의식)을 기념하기 위해 시킴까지 육로로 순례함.
그곳에서 인도 총리 네루와 중국의 조우엔라이(주은래) 총리를 만나 티벳의 악화된 정치사정을 논의함.
6.1. 캄의 게릴라 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은 승려와 순례자들이 들어 찬 리탕의 거대한 사원을 폭격함
1957 모택동의 지시로 인해 서장자치구의 개혁촉진이 압박 받음. 칼라차크라 관정 내림
1958 동부 캄 지방을 비롯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남.
1959 3.10. 티벳 민중들, 포탈라 앞에 집결하여 라싸의 봉기. 중국군은 노블링카 궁에 포탄 투하.
3월10일 라싸에서 티베트 위교군 전면 무장봉기. 달라이라마, 이날 오후 3시 티베트에 주둔 중이던 인민해방군 병영 강당에서 상연될 연극 관람 예정. 하루 전인 9일 저녁 모번 라싸 시장이 “인민해방군이 내일 달라이라마를 연극에 초대한 뒤 베이징으로 납치하려 한다”며 “노부링카(달라이라마가 기거하던 여름궁전)으로 가 달라이라마에게 인민해방군 병영에 가지 말 것 청원하자”고 주장. 10일 새벽부터 2000여명의 군중이 노부링카 앞에서 “티베트 독립” “한족 몰아내자” 등 구호 외치며 시위. “인민해방군이 달라이라마를 연극에 초대한 뒤 독살하려 한다”는 유언비어 퍼짐. 소요 사태 확산. 티베트인으로 인민해방군 부사령원(부사령관) 자리에 오른 쌍포 체왕런친 등 시위대에 구타당함. ‘티베트자치구’ 주비위원회 위원인 켄총팍발라 쏘남걀초, 시위대에 구타당해 사망. 시위 주도 세력, ‘인민대표회의’, ‘티베트 독립국 인민회의’를 개최하고 “티베트 독립” 선언. 무장 소요 확산. 인민해방군 진압 시작.
3월17일 달라이라마, 어깨에 영국제 장총 한 자루를 멘 병사로 위장한 뒤 80여명의 호위단과 함께 포탈라궁을 빠져나옴. 달라이 라마는 7만5천명의 난민을 이끌고 인도로 망명길 오름(3월18일, 23세).
중국군과 티벳민중의 전투로 티벳 민중 대학살(3.20. 8만명 이상이 살해됨). 티벳인 수만명이 달라이 라마를 수행하며 히말라야를 넘어 망명길에 오름. 3월31일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 이 즈음 10만 이상의 티베트인이 국경을 넘어 인도로 망명. 인도 북부 다람살라(Dharamsala)에 정착. 4월 27일 인도 도착.
중국, 티벳정부의 권한 백지화(3.28)
인도정부(네루수상)에 망명신청(3.29). 망명 직후 법왕은 기자회견을 열어 14차 UN총회에 보내는 성명을 발표(6월 20일)하는 등 국제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함.
10월 유엔에 티벳에 관한 의제를 상정하였고, 유엔 총회는 1959년, 1961년, 1965년 총회에서 결의문 채택.
"티벳인의 기본적 인권과 자치권을 포함한 모든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의 중지"를 요구하는 결의문 채택됨.
영국 통치시절의 감옥소 자리에 티벳식 사원캠프 건설 (북사 캠프시대 시작)
20년 동안 사원규칙`철학`형이상학 등을 공부한 끝에 불교최고과정인 게셰 시험에 합격. 바라나시 힌두대학교의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필리핀으로부터 공동체지도자상인 막사이사이 상을 받음
중국공산당, 티베트에서 정·교분리, 전통 농업·목축업의 사회주의적 개조에 착수.
1960 인도의 무력보호를 받으면서 다람살라에 티벳 망명정부 수립. 이곳에서 티벳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개시함.
1962 영국에서 자서전 "나의 조국과 나의 민족" 발간
1963 티벳의 새헌법 초안 마련. 민주헌법을 약속하는 헌법 공포(헌법초안은 비폭력과 관용의 불교정신, 입헌군주제, 대중민주주의를 적절히 혼합한 것임). 헌법에 따라 임시정부 조직.
1965 중국, 티벳을 중국자치구로 선언(9.9). 달라이 라마, 스위스에서 "불교입문" 발간
1966 북사 캠프의 폐병 창궐.
마오쩌뚱의 문화혁명(4구타파운동; 오래된 사상·풍속·문화·습관)의 여파가 중부티벳까지 밀려 옴. 그 후 10년 동안 6천개의 사원 중 아홉 개를 뺀 나머지 사원은 모조리 파괴됨. 군인들이 8월 25일 라사의 주사원인 조캉을 약탈함.
중국의 문화혁명에 앞장선 홍위병(붉은 안장을 찬 광기의 군대들)들이 겔룩파의 모든 사원을 거의 초토화시켰고, 승려들은 강제 환속 당함. 전 티벳의 고대유적이 초토화됨
1967 일본과 태국 방문
1969 미국에서 "행복, 카르마, 마음" 발간.
1970 티벳 독립을 위한 티벳청년당 발족
1972 북사 캠프를 떠나 새 정착지 건설. 태국방문. 미국에서 "지혜의 눈뜨기" 발간.
중국이 티벳의 국민투표에 동의한다면 티벳으로 돌아가겠다고 제안함.
1973 아시아 이외의 지역을 방문한 최초의 달라이 라마. 바티칸에서 요한(바오로) 6세 만남.
이후 요한(바오로) 2세와도 여러 번 만나 세계의 평화와 조화에 대해 의견 나눔.스위스, 네덜란드, 아이랜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영국, 서독, 오스트리라의 10개국 방문. 노르웨이에서 팔케타 상을 받음
1974 스위스와 인도남부의 티벳정착촌 방문
1975 영국과 미국에서 "티벳불교와 중도의 핵심" 발간
1978 일본방문
1979 몽골,소련, 그리스, 스위스를 방문하고 미국을 처음으로 방문함.
시애틀 대학과 로스엔젤레스의 동양학 대학에서 명예인문학박사학위 받음.
아시아 불교평화 위원회에서 평화메달을 받음.
티벳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는 중국의 요청이 있은 후, 다람살라에서 티벳으로 진상조사 파견단을 보냄.
진상조사파견단은 티벳문화의 대대적 파괴 상황과, 티벳 국민들의 달라이 라마에 대한 열광적 지지를 확인함.
1980. 미국,캐나다, 일본, 바티칸 방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남.
2차, 3차 진상조사단 파견. 달라이 라마의 여동생 페마 걀포가 3차 진상 파견단의 단장으로 나섬.
라사의 민중이 달라이 라마에 대한 열광적 지지를 표시하고 중국통치를 거부하자, 중국 당국은 3차진상파견단을 축출함.
1981 네팔, 미국, 영국 방문. 영국에서 웨스트민스터 공을 만남.
매디슨 주 위스콘신에서 서방에서 최초로 칼라차크라 의식을 거행함.
1982 몽고, 소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 헝가리, 스페인,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바티칸 방문.
4차 진상조사단이 티벳에 들어감. 다람살라에서 출발한 또다른 티벳파견단이 베이징에서 중국의 비타협적인 태도에 직면함
1983 스위스, 서독, 오스트리아, 터키 방문
1984 중국의 햇볕정책으로 종교의 자유허용. 사원들도 복구되기 시작함. 중앙티벳과 서부티벳의 일부를 서구세계에 개방함.
일본,영국, 서독,미국 방문. '베이징 파견단이 다람살라에 도착하여 달라이 라마가 1985년에 티벳으로 돌아가는 문제를 논의함. 그러나 타당한 양보안遁을 얻어내는 데 실패.
미국에서 "친절,명철, 통찰" 발간
1985 서독,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바티칸, 소련, 이탈리아, 프랑스 방문.
환경보호를 위한 보편적 책임을 주장하는 메시지를 "세계환경의 날"에 선포함
1987 라사의 세라사원 승려, 59년 항거 이후 최대규모의 독립시위(10.1). 중국의 계엄령 선포(10.5. 라사에 군경 투입하여 사원통제·승려검거·신도체포·외국인입국통제)
라사에서 독립시위발생(10.6. 드레풍사원 여명 행진하자, 60여명을 체포). 중국군이 독립을 요구하는 라사 군중들에게 직접 발포하여 시위를 중단시킴.
스위스, 서독, 미국을 방문. 서동에서 레오폴트 루카 상을 받음. 9월 21일 워싱턴에서 열린 의회인권 코커스에서 평화계획 5개조를 제안함.
1988 이탈리아, 서독, 스위스, 바티칸,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프랑스 방문.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유럽의회 회원국들에게 망명티벳정부와 중국간의 협상을 위한 구체적 틀을 제시함. 알베르트 슈바이처 인건상을 받음
1989 라사에 계엄령 선포(3.7. 이후 13개월간 계엄)
3월 10일 티벳봉기 10주년을 맞이하여 라사와 전세계 주요도시의 중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가 있었음.
미국(2회), 코스타리카, 멕시코, 프랑스, 서독, 노르웨이 방문, 뉴욕에서 라울 월렌버그 의회 인권상을 받음. 캘리포니아 주 산타모니카에서 칼라차크라 의식을 거행.
달라이 라마 노벨 평화상 수상자 확정(10월). 12월 10일 노벨평화상 받음.
10대 판첸 라마가 청해성에서 객사.
1990 체코슬로바키아, 벨기에, 미국, 이탈리아, 캐나다, 네덜란드, 프랑스 방문. 1991년을 국제티벳의 해로 지정.
인도의 사라나트에서 칼라차크라 의식을 거행. 중국 당국은 만명의 티벳순례자들이 이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막음
1991 미국, 티벳 난민 1000여명 망명 허용.
미국,영국, 아일랜드, 몽고, 발틱제국, 불가리아, 소련방문,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존 메이저 총리 만남.
미국 의회를 설득하여 티벳을 "피점령국"으로 선언하도록 함. 인도주의적 봉사의 공로로 암베드카르 상을 받음
1992 헝가리, 오스트리아, 러시아,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방문. 미국의 지구정상회의에 참석.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 참석하고 헝가리 의회에서 연설. 80세의 우그옌 틴레이를 17대 걀와 카르마파로 인정.
1993 라사시민들, 진료비 부과와 물가폭등으로 시위
미국,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캐나다, 가봉, 폴란드 방문.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만남. 비엔나의 국제연합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방문하였으나, 중국측에 의해 봉쇄됨. 이에 다수의 노벨수상자들이 대회를 보이콧함.
1995 11대 판첸 라마를 달라이 라마가 공인하자(5.14), 중국이 겐둔 최끼 니마를 납치(6살)
1996 중국이 11대 판첸 라마를 옹립하여 그해 여름 타시룬포사원의 원장에 앉힌 후, 나이 어린 판첸 라마는 어용시비에 휘말리고 있다.
1998 인도 뉴델리에서 티벳청년당 단식투쟁(4.27. Thupten Ngodup 사망). 달라이 라마, 11월 10일 미국 방문하여 클린턴과 티벳문제 논의하면서 티벳의 독립의지를 강력히 전달
1999 TYC,제네바 UN본부 앞에서 단식투쟁(4.5). 17대 카르마파 어젠팅리 도르제, 중국 탈출. 2002년 현재 17대 카르마파는 인도 북동부 시킴 사원에서 망명생활 중
2000년 1월1일, 중국 당국에 의해 승인을 받았던 17대 카르마파 린포체, 인도의 다람살라로 망명.
2001년 티베트 망명정부, 망명 티베트인의 직접 선거를 통해 쌍둔 린포체를 ‘정부 수석부장’(행정부의 최고 수장)으로 선출, 정치-종교 분리, 티베트 망명정부 민주주의 발전의 전환점 마련.
2002년 6월30일 제4차 ‘중공중앙 티베트공작 좌담회’, 칭짱철도 건설 포함 티베트 지원 117개 항목 확정.
2006년 7월1일 중국 칭하이성 거얼무와 티베트 라싸를 연결하는 ‘칭짱철도’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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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호의 <중앙아시아 기행>
라사 거리는 이미 중국의 거리와 다를 것이 없다.
수도 라사에서 머문 지도 일주일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미루었던 포탈라궁으로의 산책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예전에도 인도의 타지마할같은 유명한 건축물들은 나에게 완벽한 감동을 주지는 못했었기에 그 유명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보다는 시장 구석이나 한가로운 골목들을 돌아다니는데 더 몰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보고난 후의 실망에 대한 유혹(?)을 떨치지 못한 나는 쌀죽과 중국식 만두 두세 개를 아침으로 먹고난 후 30여 분 거리의 포탈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거리는 번화했습니다. 많은 중국인들의 식당과 옷가게들, 그리고 외국의 유명한 전자회사와 스포츠상품 메이커들이 이미 라사 시내 곳곳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습관적으로 개업 행사에 동원되는 도우미들이 댄스음악에 맞춰 이리저리 몸을 흔들고 새로 지은 듯한 쇼핑센터 앞쪽에는 바람을 불어넣은 홍보용 인형이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포탈라 궁성이 보였습니다. 그 옛날의 웅장했던 자취가 아직 가시지는 않아보였지만 한쪽에서는 외벽을 치장하는 중국 정부의 공사판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 앞 광장에는 말로만 듣던 새로 생긴 호수공원이 있더군요.
그 호수공원은 중국정부가 의도적으로 포탈라에 대한 경외심을 약화시키기 위해 만든 것 중의 하나인데 예전의 넓은 광장을 파서 인공호수를 만들고 보트를 타는 유원지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사실 라사의 여행자들이 수군거리는 말 중에는 이것 말고도 포탈라궁전 맞은 편의 텔레비전 송신탑 얘기가 더 유명합니다. 역시나 포탈라 지붕의 높이보다 일부러 탑 끝을 높게 만든 것이죠.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유치한 식민지에서의 악행의 흔적들이 없는 것이 아니어서 그리 기분이 좋지가 않았습니다.
사원에 가면 모택동의 초상화가 벽면에 그려져 있고 '인민 해방 만세'라고 쓴 표어를 본 적도 있습니다. 물론 중국 개방 이전의 문화혁명 때 이루어진 것들로 보입니다.
이렇듯 티벳의 유명하다는 도시의 상권과 경제력은 이미 중국에서 이주해온 중국인들에 의해 잠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무기로 티벳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어찌보면 순진한 티벳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은 이미 없는지도 모릅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달라이라마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장기적으로 티벳 민중의 삶을 행복하게 하고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승왕제도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인도의 다름살라에서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달라이라마는 국가의 재건에 대해서 종교적으로 부여받은 자신의 권위마저도 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포탈라궁 사진은 제가 이번 여행에서 찍은 사진 중 기억이 오래 남는 사진 중 하나입니다. 공사장의 노동자들과 겹쳐진 포탈라의 모습과 광장의 오성홍기, 그리고 그런 와중에서도 보도블럭 위에서의 오체투지를 계속하던 티벳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때가 아마도 중국의 올림픽 유치로 아시아권이 떠들썩할 때였습니다.
포탈라 궁전을 비롯한 티벳 내의 라마교 사원들은 중국 침공 후 폐쇄되었다가 1980년을 전후해서 관광 진흥 정책과 함께 종교의 자유가 주어져 다시 참배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티벳 내의 독립 세력에 대한 견제를 계속 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많은 사원들의 승려 인원은 예전의 수준을 크게 밑돌고 있다고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아래 글은 어느 책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티벳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첨부합니다.
티베트가 중국의 침략을 받은 해, 달라이 라마는 열여섯 살이었다. 13세기 중엽 몽고군의 침입으로 청나라 시대까지 진행된 중국의 티베트 진주는 꽤나 오랜 정복의 역사이다. 근대에 접어들어 러시아, 영국 등의 열강이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면서 달라이 라마 13세의 티베트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함께 티베트의 영유권을 선언한 중국 공산당은, 1951년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달라이 라마 13세의 죽음과 함께 다음 대 달라이 라마로 선출된 14대 달라이 라마는 통치권자로서 전권을 위임받고, 티베트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의 중국 지도자들과 협상을 나누면서 티베트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그의 정치적 역경은, 위대한 자연과 부처의 존재 안에 머물러 있던 어린 소년을 크게 성장시켰다. 그러나 20세기 초까지 고립된 왕국으로서 신의 말씀 안에 살았던 평화로운 이 나라가 격동의 현대세계에서 가질 수 있는 발언권은 극히 적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959년 자신들의 달라이 라마를 지키기 위한 티베트인들의 봉기가 라싸에서 일어났다. 중국의 식민적 수탈과 정치적 탄압에 항거하여 티베트 국민들이 일제히 봉기했을 때 당시 6,000여 불교 사원이 파괴되었으며, 120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학살되었다. 당시 젊은 나이의 달라이 라마로서는 고난 앞에서 국민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의기가 충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살아 남아 티베트의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애정어린 호소에 그는 결국 인도로 망명하였다.
이후 40여 년에 걸친 그의 망명생활은 자유와 평화를 향한 쉬임없는 고행의 길이었다. 이 엄청난 민족적 비극 아래 비폭력을 신봉하는 종교 지도자로서의 고뇌와, 현실적 폭력을 외면할 수 없는 정치 지도자로서 달라이 라마는 어떠한 사상적 편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는 1989년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억압받은 모든 사람들, 그리고 세계평화와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이 상을 받게 된 것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 상이 변화를 위한 비폭력주의적 실천이라는 새로운 전통을 세운 마하트마 간디에게 바쳐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분의 비폭력주의적인 삶은 저에게 교훈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욕망을 버리고 영혼의 정화를 갈구하는 티베트인들, 그러나 종교는 아편이라고 믿는 중국정부의 티베트 점령은 한 고립된 국가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중국 당국은 지금도 여전히 티베트의 민족적 문화적 고유성을 파괴하려는 계획적이고도 치밀한 책략을 시행하고 있다.
티베트인들에게 있어 신앙은 생활이자 정신이다. 수많은 티베트인들을 이끌고 히말라야의 고지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운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고유문화의 보존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비폭력 평화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달라이 라마는 수상을 계기로 티베트의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구심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비폭력주의 노선에 입각한 그의 평화사상은 전 세계인의 지지를 받아 티베트와 달라이 라마를 지지하는 우호적인 전 세계 인류를 동지로 확보할 수 있었다.
- <달라이 라마 - 티베트에서 온 편지> 중에서 (매튜 번슨 지음 ; 혜윰 펴냄)
중국은 티벳을 어떻게 '역사 살해' 했나
최근 중국의 '고대사 왜곡' 문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의 '고대사 왜곡' 문제가 갖는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프레시안>은 중국 현지에서 '티베트학'을 연구하고 있는 한국인 학자 A씨와 긴급히 연락을 시도, 익명을 전제로 그의 기고를 받았다. A씨는 자신의 실명이 드러날 경우 중국에서의 연구활동에 차질이 있을 것으로 판단, 익명을 요구했다.
A씨는 중국이 티베트 역사를 중국의 소수민족사로 포섭하기 위한 수십년에 걸친 집요하고 다양한 시도를 소개하면서, '티베트'를 '고구려'와 '한국'으로 바꿔 읽어보라고 제안하고 있다. 티베트 다음은 우리나라 차례라는 의미에서다. 아울러 중국의 '역사 침공'에 대해 수동적 대응으로 일관하지 말고 '역사 북벌(北伐)' 등 공세적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다음은 A씨의 기고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동북공정과 티베트 : "뒤통수를 쳐라"
"중국인들은 한번도 그들의 일부인 적이 없었던 티베트인이 과거와 현재 중국 '민족'의 일개 '소수민족'이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현대 민족국가의 관점에서 중세 제국적 관계를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상 새로운 형식의 중국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려는 기도의 일부다."
이는 네덜란드 국제법 학자 반프라그(Michael C. van Walt van Praag)가 쓴 책 <티베트의 지위(The Status of Tibet: History, Rights, and Prospects in International Law)> 서문에 나온 대목이다. 프란츠 마이클(Franz Michael)이 쓴 이 서문에서 '티베트'를 '한국'으로 바꿔 읽어보기 바란다. 슬기로운 사람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미리 알 수 있을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1996년 6월 27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게 한국은 늘 형제의 나라로 여겨집니다. 진리를 따른다는 점에서 티베트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은 쌍둥이 형제와 같습니다. 티베트는 역사적으로 독립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역사책 속의 사실'일 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다가올 미래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이 정치·종교지도자를 '민족의 반역자'로 규정하고 있다. 또 티베트가 독립 국가였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 어느 학자도 중국정부의 입장을 벗어나는 의견을 내놓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공산당을 비판하는 글을 쓰지 못한다. 이미 중국 모든 대학의 인문·사회계열 수업에서 교수들이 자유롭게 공산당을 비판하는 풍조가 만연한 것을 감안한다면 기이한 대목이다.
"중국이 티베트 인민을 해방시켰다"
오늘날 일반적인 국제여론은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티베트는 분명 독립국이었다. 역사적으로 따져 봐도 티베트는 분명 중국과 다른 문명이요, 다른 국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학자들은 '티베트가 왜 중국인지'를 온갖 학술적 근거를 내세워 증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티베트가 역사적으로 독립국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관점과 태도는 비학술적이고,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다"며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이댄다.
"봉건 농노제도가 사망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소수 티베트 상층 반동 집단과 분열주의 분자들은 원한을 품은 거짓말쟁이들이다. 그들은 티베트 인민을 다시 통치하려는 환상을 실현하기 위해 민족 증오를 선동하고 사회진보를 파괴하며 국가분열을 제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서장 독립'을 외치는 것이다."
티베트에 대대로 농노제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중국학자들은 티베트 농노제도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다. "티베트 민중들이 오랫동안 소수 반동집단 억압에 고통 받고 있었고, 중국공산당이 이들을 해방시켰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른바 '종(농노)'은 중국에도 있었고, 한국에도 있었다. 그들 주장대로라면 중국공산당은 티베트를 해방시키면서 왜 남한을 해방시키지 않았는가. 또한 지금 중국에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없다. 만약 미국이 "공산당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중국 인민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현 중국 정부를 비판한다면, 그 때는 뭐라 변명할 것인가.
한편으로 중국 학자들은 예부터 한족(漢族)과 티베트 민족이 "장인과 사위 관계였다"는 봉건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당태종이 문성공주(文成公主)를 토번왕국 임금 송?감포(松贊干布)에게 시집보낸 뒤, 한족과 티베트 민족은 장인과 사위 관계가 되었다."
이는 분명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문성공주는 가짜공주다. 당태종이 토번왕국의 군사위협에 굴복하면서 급조해 시집보낸 가짜공주인 것이다. 설령 문성공주가 진짜공주라 하더라도 과거 봉건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오늘날의 현실을 합리화시키려는 이런 식의 접근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고려는 한 때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다. 그런데 이를 근거로 현재의 대한민국이 몽골 또는 중국의 일부라 주장한다면 너무나 황당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송?감포와 결혼한 또 다른 사람이 있다. 브리쿠티라는 네팔공주다. 중국학자 논리대로라면 네팔도 티베트에 대해 역사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군색한 논리는 계속 이어진다.
"티베트의 역대 임금과 라마는 모두 중국 왕조의 책봉을 받았고, 대대로 조공을 했다."
슬기로운 사람은 안다. 이는 중국학자들이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논리라는 것을. 정말 중국과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면 조공을 받을 필요도 없다. 그냥 세금을 거두면 될 것 아닌가. 이 논리대로라면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렇게 선언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중화민족의 일부다." 그냥 코웃음치고 넘어갈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소름끼치는 이야기다. 지금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한반도 잡아먹기'이기 때문이다.
"내것은 내것, 네것도 내것"
"원나라 이래, 티베트는 정식으로 중국 영토 안에 들어왔다."
여기에서 황당한 사실을 알 수 있다. 13억 인구가, 원나라를 중국왕조라 생각한다. 13억의 착각! 이 집단의식이 무서운 것이다. 한 중국 대학생과 역사토론을 한 적이 있다. 당시 그 학생은 원나라와 징기스칸·쿠빌라이칸이 자랑스런 중국역사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내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원사(元史)에 이런 얘기가 나와. 쿠빌라이가 대신들을 모아놓고 한 번 물어봤어. '우리, 한족 애들, 그냥 다 죽여버릴까?' 그러자 대신들이 반대했지. '그러면 세금을 거둘 수 없는데요.' 너는 이 사람들이 중국인이라 생각하냐?"
이에 대한 그 학생의 답은 이러했다.
"우리를 지배했기 때문에 우리 조상이다!"
오늘날 중국학자들은 중국 역대왕조가 티베트를 지배했기 때문에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지배했으므로 중국이고, 지배당했으므로 중국이다. '내것은 내것, 네것도 내것'인 셈이다.
정말 답답하다. 원나라가 어째서 중국이란 말인가. 원나라는 몽골의 역사 아닌가. 중국의 논리대로라면, 중국 정부는 왜 이란·이라크·아프가니스탄·러시아·폴란드·체코·헝가리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지 않는가. 한국인은 36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중국인은 1백년간 몽골인의 지배를 받은 것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른바 '아큐산법(阿Q算法)'이라는 것이다.
아큐가 불량배들에게 두들겨 맞은 뒤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저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사실은 내가 이긴 거야.' 그리고 아큐는 의기양양하게 걸어간다. 1920년대 중국지식인들은 노신이 쓴 이 <아큐정전(阿Q正傳)>을 읽고 '혹시 내 얘기 하는 것 아닌가' 의심을 품었다고 한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역사는 조작하면 된다. 우리를 지배했기 때문에 우리 조상이라 주장한다. 중국이 한반도를 다 먹으면, 중일전쟁도 국내전쟁으로 조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일본은 중국의 일부다. 대대로 중국의 지배를 받아 왔다."
일반적인 국제여론은 티베트 독립을 지지한다. 그러나 13억 인구를 갖고 있는 중국은 이에 격분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1백년 뒤 한반도를 놓고 벌어지는 현상일 수도 있다. 중국 학문은 '정치'에 복무해야 한다. 그리고 중국정부 이익을 침해하는 이론을 발견하면 가차 없이 매도해야 한다. "비학술적이오!"
"정부 이익에 철저한 중국 학문"
참으로 학술적인 태도는 무조건 내 이론만 맞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상대의 결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국이든 타국이든 정권의 부조리함을 용기 있게 비판하는 것이다. 즉 양심 있는 지식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강력한 독재국가이므로 학문이 철저한 통제를 받는다. 언론도 통제받는다. 시민단체? 사실상 없다. 전지전능한 중국 공산당이 "고구려는 중국이야!"라고 명령했으므로, 학자는 이에 순응해야 한다. 바로 앞 문장에 있는 '고구려'라는 낱말을 '티베트'로 바꿔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미국에 거주하는 반체제인사 조장청(曹長靑)은 1996년 대북(臺北)에서 출간한 <중국대륙 지식분자가 논한 티베트(中國大陸智識分子論西藏)>에서 이렇게 말했다.
"왜 아주 많은 중국인이 티베트(중국인은 서장이라 부른다) 문제에 대해 언급할 때 강렬한 민족 정서와 대국 국수주의 의식을 갖는가? 주요 원인은 공산당이 장기간 행한 단일성 주입으로 인해 티베트 문제에 대한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이 이미 공산당의 선전기구와 같은 방향의 궤도로 향하기 때문이다. 언론자유와 보도자유가 없는 중국 대륙에서 정부는 출판을 통치하여 역사의 해석도 통치한다. 이런 전제사회에서 역사 진실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역사에 대한 해석이 관방의 이데올로기와 부합하는가 여부다.……중공의 티베트 문제 권위자인 아함장(牙含章)조차 그가 쓴 <달라이라마전(達賴喇嘛傳)> 서언에서 직언하기를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투쟁의 수요를 위한 것'이고 '조직상' 안배로 썼다고 말했다.
아함장의 고백은 중공이 정권을 세운 이후 출판한 티베트 문제에 관한 모든 서적의 기본 특징이 역사사실은 정부 선전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임을 말한다. 근년 대륙에서 출판한 티베트 서적은 이러한 선전 기도의 연장이다. 1993년 5월 북경 화교출판사(華僑出版社)가 30만자 이상의 <티베트풍운기실(西藏風雲紀實)>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중공이 티베트사람에게 가져다 준 '인간천당'을 극력 칭송했다.……중국인은 이러한 강렬한 선전 기도를 갖춘 단일성 서적 중에서 티베트에 관한 지식을 얻는다. 서방 학자와 망명한 티베트인 학자의 티베트 연구는 단지 북경 정부의 관점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출판하는 것이 극히 곤란하다.
유일한 예외로 미국 작가 애버든(John F. Avedon)이 저작한 <설역경외류망기(雪域境外流亡記)>가 1988년 3월 서장인민출판사(西藏人民出版社)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애버든은 미국 <뉴스위크>의 기자로, 4년 동안 미국과 인도에서 1백명 이상의 티베트인을 인터뷰했는데,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역사 사건의 증인과 달라이 라마 본인이 포함되어 30만자의 저술을 완성했다. 이 책은 광범한 호평을 받았다.……그러나 이 책을 출판한지 얼마 되지 않아 당국이 강제로 발행을 정지하고 이미 팔려진 판본을 거두었다. 중공 당국은 '긴급통지(緊急通知)'에서 이 책의 공개 발행은 '공작 중의 실수'라 밝혔다."
이 책의 서문을 쓴 이는 미국인 티베트 전문가 세이모어(James D. Seymour)이다. 그는 이 책 서문에서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현실적 이해를 이렇게 설명한다.
"중국인이 티베트에 대해 주권을 보유하고 있음을 견지하는 것은 역사와 국제법의 원인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이익의 필요에도 기인함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들은 티베트를 가져야 할 수많은 이유를 갖고 있다. 예컨대, 중국은 이 땅과 경제자원을 필요로 하고, 국가안전의 고려도 있으니, 1962년 중국·인도전쟁(中印戰爭)을 중국인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따라서 일부 개명한 중국인이 티베트 문제를 생각할 때, 정의와 법률의 각도에서 보다는 경제·정치·군사적 필요의 각도에서 더 많이 생각한다. 이러한 국제측면의 고려 외에도, 중국인은 그들의 특수한 도미노 이론을 갖고 있다. 그들은 만약 티베트 독립을 허락할 경우 신강·내몽골·만주의 독립요구도 연쇄적으로 불러일으킬 것이라 걱정한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다른 고려에 앞서 이 점을 먼저 고려한다."
내가 제시한 조장청과 세이모어의 발언에서 '티베트'라는 낱말을 빼고, '고구려'와 '한국'이라는 낱말을 적절히 집어넣어 재독하길 바란다.
"고구려사 왜곡을 위해 조선족 학자들을 적극 활용하라"
중국변강사지연구센터(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를 이끌고 있는 마대정(馬大正)씨는 중국사회과학출판사(中國社會科學出版社)가 2003년 10월 출판한 <고대중국고구려역사속론(古代中國高句麗歷史續論)> 머리말에서 중국정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1. 고구려 문제 연구를 흉노·선비 연구처럼 역사화·학술화의 정상연구궤도로 넣어야 한다. 고구려 민족과 그 정권은 중국 역사상 고대 민족이며 지방 정권이다.
2. 고구려 민족의 원류와 고구려 정권의 흥망 연구를 더욱 가열차게 하여 우리나라 학술계의 성숙한 정론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 변방사와 민족사 연구에서 족원(族源)과 지방정권연구는 종종 주변국가 변역의 축소 및 민족이동과 변화 관계까지 소급한다. 예를 들어 흉노의 서쪽이동과 헝가리민족 관계, 돌궐의 패멸과 중앙아시아 및 터키 관계, 몽고 유목제목의 해체와 몽골·러시아 관계 등이다. 이런 연구는 국내외적으로 상이한 관점이 있지만, 우리는 이 방면 연구에서 이미 비교적 성숙한 학술계 공통인식을 만들었다. 고구려 연구도 이런 연구를 거울로 삼을 수 있다.
3. 고구려 역사 연구에서 우리나라 조선족 역사학자들이 많은 작용을 발휘해야 한다. 고구려 역사, 나아가 중국과 한반도 고대 역사 관계 문제에서 중국과 한반도 관계사 연구 대오에 한국어를 알고 북한과 남한 학술계 상황을 이해하는 전문가가 너무 부족하다. 우리는 조선족 학자들에게 이해와 지지를 주어 그들이 더 큰 공헌을 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4. 고구려 연구에 있어 기초자료 건설과 연구정보 수집 및 추적 작업을 더욱 활발히 해야 한다. 중국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하며, 북한·남한 및 다른 외국의 연구 성과를 목록색인으로 만들고 정보와 자료창고를 건설해야 한다. 또 대표적인 저술을 번역해 우리가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
5. 고구려·발해 등 관련 문물과 유적 보호·개발 및 이용에 힘써야 한다. 동시에 북한·남한 등 출판물을 살펴 지적재산권 침해를 배상받아야 하며, 고구려 문물 도굴과 절취 등 범죄행위를 엄벌해야 한다.
6. 고구려역사 지식의 사회화를 위해, 과학적으로 보급해야 한다. 지금 간행하는 모든 사전류에서 고구려 관련 항목을 고쳐야 하며, 교과서와 역사보급서적에서 모범답안을 확립해야 한다.
7. 한반도 남북 역사문화전통과 민족감정을 존중해야 한다. 한반도 학계의 우리와 다른 관점과 입장을 인정한다. 우리의 태도는 당연히 한반도 남북 학계가 주장하는 '고구려 역사는 중국 고대사의 일부분임을 부정하는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 것이되 우리의 관점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학술규범과 국제관례 각도에서 정상적인 학술교류와 논쟁을 해야 한다. 정치화한 논쟁을 피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해 과학적인 연구결론을 국제학술계에 제공해야 한다.
"지금 당장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라"
중국 정부가 드디어 노골적으로 고구려사 왜곡 등 '역사 침공' 행위를 중단하라는 우리 정부 요구를 거부했다. 중국은 도리어 우리 정부에 대해 "고구려사 문제에 대한 한국 언론의 과도한 보도를 자제토록 유도해 달라"는 언론통제를 주문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의 대응은 사실상 보이지 않는다. 지금 한국은 너무나 힘이 없다. 중국에 대한 투자축소 방안도 현재 우리의 경제 상황이나 탈북자 문제, 교역 등 얽혀있는 변수들이 많아 선택이 쉽지 않다. 나는 현 상황에서 한국정부에게 이렇게 건의한다.
1. 지금 당장 기습적으로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라.
이것이 가장 확실한 단기성 경고다. 중국정부가 날뛸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일본도 자유롭게 가는데, 왜 한국을 못 간단 말인가? 달라이 라마가 분명히 말했다. "한국정부가 허락만 하면 모든 일정 다 포기하고 곧바로 한국에 가겠다"고. 중국은 오랫동안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불허하는 한국정부의 배려에 고마움을 전해왔다. 그러나 이제 따귀 한 대 때려야 한다. 우리가 10대 맞으면 최소한 5대는 때리는 단단한 꼬마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아닌가.
2. 재외동포법을 개정하라.
중국도 화교를 우대하는 각종 배려가 있다. 우리는 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야 한다. 그래서 조선족이 언제든 자유롭게 한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중국정부가 더 날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마저 안 한다면, 한국정부는 존재 이유가 없다. 이런 존재 이유도 없는 정권이라면, 다른 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해도 아깝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3. '북방아시아프로젝트'를 시작하라.
즉 '학문 북벌(北伐)'을 해야 한다. 동북공정에 맞서는 확실한 프로젝트다. 정말 학술적으로 대결해야 한다면, 우리는 정면전과 더불어 게릴라전까지 병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적의 배후를 쳐야 한다는 말이다. 가장 쉽게 말하자면 뒤통수를 치란 말이다.
고구려연구재단은 고구려사를 비롯한 동북지역의 역사를 중국사에 귀속시키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설립한 연구기관으로, 3월1일 출범식을 거쳐 10일 현판식을 가졌다. 현재 연구직 17명, 행정직 10명이다. 올해 예산은 50억원. 이것으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3조원을 50억원으로 대항하면 어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최소한 1조원 예산으로 북방아시아프로젝트를 실시해야 한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정부가 중국이라 주장하는 티베트·신강성·내몽골·동북삼성이 왜 중국이 아닌지 학술적으로 공격해야 한다. 이 일을 하려면 대한민국 모든 사학 인력을 총동원해도 모자랄 것이다. 따라서 몽골·베트남·인도·네팔·러시아의 우수한 인력과도 손을 잡아야 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모든 연구성과를 철저하게 영어·중국어·일본어·러시아어·프랑스어로 번역해 전 세계에서 출판해야 한다. 물론 중국당국은 이 책들을 모두 금서로 다룰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 있다. 중국은 복제천국이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출판물도 정본과 다를 바 없는 우수한 복제물이 판을 쳐 중국당국이 골머리를 앓을 지경이다. 이 복제물을 이용해 중국정부를 공격해야 한다. 국가정보원이 이 정도 일도 하지 못한다면, 국가정보원을 당장 해체해야 한다.
4. 중·일·미·러 전문연구기관을 설립하라.
지금 한국에 중국전문가가 의외로 없다. 겉으로는 많아 보인다. 그러나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 중국을 한 나라로 다루는 것 자체가 문제 있는 것이다. 중국 역사를 살펴보건대, 이들의 특징은 통일과 분열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중국이 막강한 중앙통제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분열한다. 중국을 각 지역별로 집요하게 연구해야 한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며,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중국·일본·미국·러시아 이 네 나라를 영원히 집요하게 연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멍에다.
5. 대만과 적극 친교하라.
중국 어느 인민에게 물어도 한반도의 통일을 바란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이른바 지식인을 만나 이야기하면 고작 듣는 이야기가 "우리는 한반도의 안정을 바란다"는 것이다. 입장 바꿔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도 중국과 대만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대만과 정식 수교를 할 수 없더라도, 사실상 수교와 다를 바 없는 수준까지 친교할 수는 있다. 중국이 북한과 남한을 상대로 등거리 외교를 하고 있다. 다른 열강도 마찬가지다. 이는 돈으로 계산조차 불가능한 피해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다. 우리도 등거리 외교를 해야 한다. 중국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를 대상으로 말이다. 한 마디로 원교근공(遠交近攻)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중국장학네트(中國藏學網 www.tibetology.ac.cn/)'에 있는 중국 티베트학의 개황을 소개하겠다. 이 글을 천천히 읽은 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티베트'를 '한국'으로 바꿔 한 번 더 읽기 바란다. 중국 대륙인들의 티베트연구 동향과 견해를 살피기 위해 직역했다.
中國藏學槪況
當代의 中國藏學은 신 중국 성립 후에 건립되어 번영하기 시작했다. 신 중국 성립 초기에, 당 중앙ㆍ중앙정부와 모택동 주석이 서장을 평화적으로 해방한다는 방침에 따라 일부 장학연구자들도 서장진군 시에 합류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입장과 관점에서 서장문제를 조사ㆍ연구하여 일부 조사보고와 학술전문서적을 저술하여 대단히 유익한 정책건의를 제출하여 서장의 평화적인 해방에 공헌을 했다.
1951년 5월 서장을 평화적으로 해방하자 정무원문화교육위원회는 중국과학원 및 일부 高等院校의 과학연구자들과 "西藏工作隊"를 조직했다. 먼저 서장에서 2여 년 동안 있으면서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그리고 여러 학문분야를 포함하여 종합적으로 고찰했다.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초에는 全國人大민족위원회와 국무원민족사무위원회, 중국과학원철학사회과학부가 선후로 조직되어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사회역사 조사를 실시하여 서장과 각 藏區의 사회현상, 역사연혁, 어언문자 등 기본정황을 광범위하게 조사 연구하여 서장의 민주개혁, 사회주의 신시대에 맞는 역사관과 과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동시에 이것은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 사상의 지도 하에 엄격한 과학적 시스템을 도입하여 당대 중국장학이 형성, 확립되기 시작했다.
"문화대혁명"이 1977년 결속된 후에 등소평 동지는《藏漢大辭典》의 편찬과 출판을 비준하였는데, 이 같은 의지의 표현으로 장학연구의 봄날이 도래한다. 1978년, 중국공산당 11屆 三中全會를 개최하여 전국은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개혁개방의 신 시기를 맞이하였는데, 중국 장학연구도 더욱 생기발랄하게 번영하기 시작했다. 중국 장학 50 여 년의 발전역정을 회고하면, 특별히 개혁개방 20여 년 동안 거대한 성취를 얻었는데, 다음의 몇 가지 방면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연구기구의 건립과 전문연구인력의 형성과정과 규모
개혁개방 이전의 장학은 역사, 어언, 민족 등 유관 과학연구 단위로부터 연구가 시작되어 초보적인 기초를 다졌고, 개혁개방 이후에는 당과 국가가 藏學사업을 고도로 중시하여, 선후로 현대적인 연구기구가 건립되어 지금은 50여 所에 달한다.
80년대 중기에 중국 장학연구중심과 서장사회과학원이 연이어 건립되고, 그 다음에 북경, 서장과 사천, 청해, 감숙, 운남성 등의 장족 거주지에서 또 선후로 일부 전문적인 연구기관이 건립되었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연구팀이 비교적 전문적이고 숙련되었고, 연구활동이 모두 대단히 강한 地域性과 응용성을 지니고 있는데, 주요하게 현지의 지리조건과 학술자원을 활용한 것이 장점이다. 또한 현지의 사회, 경제발전과 문화, 역사, 종교 등의 문제 등을 연구하여 지역연구 방면에서 유리한 장점을 지니고 있어 현지의 黨政부문의 정책결정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또한 일부 연구기관과 학과는 하나의 전문적인 방면을 연구하여 특색이 선명할 뿐만이 아니라 한 분야의 연구영역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그들의 연구작업은 중국 藏學사업의 중요한 기초가 될 뿐만이 아니라 藏學연구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
한편, 藏學 연구기관 중에는 전문적으로 장학관련 서적과 학술간행물을 출판하기도 한다. 예컨대 中國藏學出版社, 西藏藏文古籍出版社 및 각급 民族出版社 등; 정기학술간행물로는《中國藏學》《中國西藏》 《西藏硏究》《西藏大學學報》《西藏民族學院學報》《西藏藝術硏究》《藏語文工作》《西藏敎育》《西藏科技》《西藏地質》등등이 있다.
이밖에 중국의 각 성과 區에는 다양한 학술단체가 있다. 예컨대 中國科學靑藏高原硏究會, 西藏自治區藏學學會, 四川省藏學書院, 甘肅省藏學硏究會, 云南省民族學會藏學硏究會 및 각 유관 省 區 내의 藏語文硏究會, 《格薩爾》硏究會, 藏醫硏究會, 民族語文飜譯協會 등이 있다.
이상이 중국 장학연구의 주체이다.
50여 년 동안 중국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무장하여 고도로 전문적인 연구인력을 배양해왔는데, 현재 장학연구에 종사하는 인원은 1천여 명 이상이며, 그 중에 藏族 학자가 과반수에 이르며, 고급 기술전문가로 종사하는 인원은 약 삼분이일에 달한다. 또한 중앙민족학원등과 각성의 民族院校에 藏學 전공학과를 개설하여 대량으로 본과생을 교육했고, 80년대 중 후반기부터는 석사, 박사과정을 개설하였다. 1987년부터 2000년 사이에 전국에서 배양한 석사는 200명에 달하고, 박사도 수십여 명을 배출시켰다. 장학연구인원도 점차 광범위해져서 노년부터 중년, 청년에 이르고, 藏族은 물론 漢族과 각급 민족학자들까지 단결하여 협조하여 藏學연구는 신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생기발랄해지고 있다.
2. 학술연구 성과와 연구영역
《中國藏學書目》과《中國藏學書目續編》의 통계에 근거하면 1949년부터 1995년까지 전국에서 藏學관련도서가 2200여종이 출판되었는데, 그 중에 1992년부터 1995년까지 4년 간에 출판된 도서는 700여종에 달하며 다른 통계에 따르면 1996년부터 1999년까지 4년 간에 출판된 도서는 1000여종이 넘었다고 한다.
1950년부터 1998년까지 전국에 각종 신문과 간행물에 발표된 연구논문과 글은 약 2만4천여 편에 이르고, 그 가운데 1950년부터 1979년까지는 3천7백여 편으로 매해 평균 120여 편이었다. 1980년부터 1990까지는 1만3백여 편으로 매해 평균 940여 편이고, 1991년부터 1998년까지 1만1여 편으로 매해 평균 1천2백6십여 편에 달했다. 이러한 통계로 미루어 중국 장학연구는 부단히 발전하고 진보하는 추세이다.
신 중국 성립이래, 특별히 개혁개방 20여 년 동안에 장학연구자들이 공개적으로 권위가 있는 학술물을 출판했는데, 장학연구의 각 분야에서 최신 연구 수준을 반영하는 것들이다. 예컨대《西藏佛敎發展史略》《達賴喇嘛傳》《班禪額爾德尼傳》《歷輩達賴喇嘛與班禪額爾尼年譜》《西藏封建奴隸制社會形態》《論西藏政敎合一制度》《中國藏族部落》《西藏通史》《藏族簡史》《藏族歷史年鑑》《西藏歷史地位辨》《西藏地方與中央政府關係史》《西藏經濟簡史》《靑藏高原環境與發展》등의 叢書들은 前人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모두 새롭고 독자적인 견해가 실려있어 국내외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漢文 문헌의 발굴과 정리, 출판도 장학연구 중 중요한 부문이었다. 예컨대《元以來西藏地方與中央政府關係檔案史料匯編》《西藏歷史檔案薈萃》《西藏地方是中國不可分割的一部分史料選輯》등 중요한 문헌의 성과도 약 2백여 종에 달하는데, 이 중에는 희귀본도 적지 않다. 또한 中國藏學硏究中心은 수 차례에 걸쳐 中國第一歷史檔案館, 第二歷史檔案館 및 감숙, 사천, 청해, 운남성의 檔案館이 지니고 있는 西藏과 藏史檔案史料目錄를 공동으로 편집하여 계속 출판하여 정확한 檔案文獻 소식을 제공하고 있다.
藏文 古籍의 발굴과 정리, 출판도 藏學연구 중 중요한 성취가 있었다. 西藏藏文古籍出版社는 이미 藏文古籍珍本 200여부를 출판했고, 일부 희귀본 藏文古籍도 연속하여 출판할 예정이다. 西藏人民出版社도 일부 藏文 고전 名著와 歷史檔案叢書를 2백여 종, 1백여 만冊을 출판하였는데, 그 중에는 手抄本, 木版本, 埋設되었던 각종 藏文 典籍을 각종 정교한 인쇄본으로 출시하였다. 예컨대 《西藏王統記》《西藏王臣記》《漢藏史集》《靑史》《紅史》《賢者喜宴》《薩迦世系譜》《多仁班智達傳》《頗羅鼐傳》《噶倫傳》《喜饒嘉措文集》《薩班全集》《根敦群培著作》《布頓佛敎史》등의 藏文古籍 출판하여 국내외 藏學界에 강렬한 反響을 일으켰다. 더욱이 주목한 일은 藏文版《中華大藏經》을 대조, 정리 작업이 순조로워 현재 이미 55部나 출판하여 발행하였다.
국내외의 藏學界의 학술 교류도 빈번하여 번역 출판한 서적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예컨대 《現代西藏的誕生》《喇嘛王國的覆滅》《西藏中世紀史》《十八世紀前期的中原與西藏》《敦煌吐蕃歷史文書考釋》등 일부 국외 藏學著書는 중국학자들에게 해외 장학연구가의 연구 성과와 추세, 방법들을 가름하여 상호 발전적 학술교류를 도모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藏族의 민간문화예술 유산도 대규모적으로 조사하고 발굴하여 수집, 정리함은 물론 출판하였는데, 《中國戱曲ㆍ西藏卷》《中國歌謠集成ㆍ西藏卷》등 장족 민간예술과 종교예술 방면등 총 십대 부문의 文藝 集成志가 연속해서 출판되고 있다. 문학방면에선 《格薩爾王傳》이 국가 중점사회과학 연구과제로 선정되어 5여 년 동안의 계획으로 전문적인 연구기구가 설립되어 민간의 문자와 說唱자료를 수집하여 무려 4만여 자의 문자자료를 정리했다. 이에 관련해 출판한 저서만 30여부에 달하고, 발표한 논문만도 1천여 편에 이른다. 이러한 성과는 장학연구자들이 장기적으로 민간에 유포된 口頭문학의 시리즈를 완벽하게 문학의 거작으로 만들어 놓은 노력의 산물이다.
서장의 考古學와 文物연구의 진보는 藏學연구를 더욱 심화시켰다. 현재 발굴된 60여 곳의 석기시대 유적과, 20여 곳의 고대 암각화, 240여 곳의 古墓葬, 昌都의 卡若遺址, 拉薩의 曲貢遺址, 古格故城 등은 학술적 가치와 과학적 연구에 중요한 실물자료로 문헌자료의 부족에서 오는 역사적인 사실을 傍證해 준다. 그리하여 《古格故城》《昌都卡若》《拉薩曲貢》《西藏布達拉宮》등의 관련 학술서적들이 출판되었고, 이들 자료는 藏學연구의 영역을 보다 광범하게 만들었다.
근래에 와서 藏醫藥 분야도 매력적인 연구영역으로 자리잡고 있다. 일부 藏醫學院과 藏醫연구소가 계속하여 건립되어 古藏醫 문헌자료를 정리 출판하고 있다. 또한 유명한 藏醫전문가의 소중한 경험을 정리, 연구, 출판되고 있다. 예컨대 《四部醫典》과《醫學百科辭典ㆍ藏醫分卷》《藏醫生理學》《病理學》《藥理學》《飮食學》《新編藏醫學》등 수십 종이 출판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국제 藏學界가 주목하는 학문의 하나가 되었다.
3. 학술교류
근래에 와서 각 장학연구기구들은 적극적인 학술교류를 전개하고 있다. 서장의 역사, 어언, 종교, 민족, 철학, 문학, 예술, 교육, 천문역산, 藏醫藏藥 등의 분야에 학술토론회가 60여 차례가 개최되었고 300여 가지의 연구과제가 완성되었다. 지역별 혹은 전국적인 장학토론회와 홍콩, 대만지역과의 학술교류, 학술계와 黨政부문의 교류 등 각종 형식의 학술교류가 藏學연구를 발전시키고 있다.
국제적 학술교류도 날로 증가 추세이다. 중국에서 주최하는 국제적 藏學硏討會로는 《格薩爾》國際硏討會, 北京藏學硏討會, 拉薩藏醫藏藥國際硏討會 등이 있고, 중국 藏學학자들이 제 6,7,8회 國際藏學硏討會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최근 더욱 가치가 있는 사실은 근래 인터넷 등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각 藏學연구기관이 홈페이지 등을 구축하여 상호간 활발한 학술 정보교류를 하고 있다.
4. 중국 藏學연구의 지침과 방향
1) 藏學연구는 반드시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에 기반으로 모택동, 등소평, 강택민 등 3대 대표의 이론과 방침에 따라 그 연구 지침을 세워야 한다. 개혁개방이후 중앙당에서는 3차례나 "西藏工作座談會"를 개최하여 방침과 정책원칙을 정해 주었는데, 그 결과 서장의 개방과 경제건설 등 각 사업들이 거대한 진보와 성취를 이루었다.
2) 藏學연구는 한결같이 애국적 기치를 가지고 국가통일과 민족단합에 이바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달라이라마 망명정부와 제국주의자들의 국가분열 책동에서 기인한 "西藏獨立論","西藏不人權" 등의 이론을 학문적으로 공박하여 중국 내 다른 소수민족과 전 세계인에게 공감을 얻어야 한다.
3) 藏學연구는 서장과 기타 藏區의 문명건설에 이바지하고 西部대개발 정책에 부응해야 한다.
4) 藏傳佛敎는 藏族사회에 거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따라서 서장의 종교문제 연구는 장학연구에 대단히 중요한 임무이다. 달라이라마 망명정부는 종교를 이용하여 허황된 사실을 주장하여 세계여론을 현혹시키고 있다. 따라서 종교의 현실과제를 심층적으로 연구하여 "執行黨의 종교정책을 관철시키고, 법에 따라 종교사무의 관리를 강화시키며, 종교신앙의 자유를 존중하되 적극적으로 사회주의사회에 적응시키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서장사회를 안정시키고 국내외 적대세력의 분열활동을 폭로하여 세인들에게 서장의 진실을 이해시켜야 한다.
5) 藏族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계승시키고, 어떻게 하여야 우수한 전통문화를 현대화시킬 것인지를 연구하는 것은 장기적인 임무이다.
6) 藏學연구 인력의 자질을 提高시키는 데 노력하여 藏學연구의 신국면을 개척해야한다. 이것은 전국 藏學연구자의 공동된 임무이다.
A씨/티베트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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