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MBC 서프라이즈를 보면서 역사속의 한 인물을 소개 받은 셈이다. 바로 메리 시콜이다. 그녀는 그동안 소수민족 또는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백인들로부터 외면되어 왔었지만, 역사의 또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크림전쟁 전쟁터에서 부상당했거나 병든 병사들을 돌 본 간호사로 영원히 남아 있다.
메리 제인 스콜 Mary Jane Seacole (1805-1881.5.14), 때로는 Mother Seacole 또는 Mary Grant로 불리기도 했다. 크림 전쟁에서 활약한 자메이카 출신의 혼혈 영국 간호사다. 일명 병사들의 검은 천사다.
화가 Albert Charles Challen(1847–81)가 그린 시콜의 초상화
크림 전쟁은 1854년부터 1856년4월1일까지 있었던 러시아 제국과 영국,프랑스,사디니아,오토만제국연합과 있었던 전쟁이다. 이 전쟁이 발생했던 곳이 흑해와 터어키에 있는 크림 반도다.
이 전쟁에서 역사속의 한 인물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백의의 천사로 불리는 간호사들의 어머니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1910)이 바로 그 인물이다. 나이팅게일이 활약하기 이전에 유럽에서 간호사들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미천한 직업이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한다면 거의 하녀 취급을 받았다고까지 할 수 있다.(그런 인식이 남아서인지, 지금도 서구의 코메디에 등장하는 간호사는 천박하게 야한 여자로 많이 묘사되곤 한다.) 나이팅게일의 업적은 크림 전쟁에 뛰어들어 열악한 야전병원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 간호사를 당당한 직업인으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이팅게일은 크림 전쟁에서 활약한 뛰어난 간호사들 중 한사람일 뿐이다. 간호사의 역량 면에서만 보자면 더 탁월한 인물이 없지 않았다. 그런 인물의 한 사람으로 메리 씨콜(, 1805-1881)을 들 수 있다.
씨콜의 고향은 자마이카였으며,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인이었고 어머니는 자메이카 흑인이었다. 아버지가 백인일지라도 자메이카에서 물라토는 거의 예외없이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는 노예 취급을 받았다. 씨콜의 어머니는 약초나 약품에 관한 지식이 많아서 사람들을 치료해 주곤했다. 이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비록 이른바 자격증은 없었지만 씨콜은 상당한 의학지식을 지닐 수 있었다. 씨콜은 계속해서 나름대로 의학지식을 연마해 나갔다.
파나마에서 묘지기를 매수해서 콜레라로 죽은 아기의 시체를 부검하기까지 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씨콜은 계피를 넣고 펄펄 끓인 물이 의사가 주는 어떤 약보다도 콜레라에 특효를 낸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군다나 씨콜의 처방은 싸고 간편하지 않은가!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스페인에서 온 의사보다 씨콜을 더 신뢰했다. 씨콜은 호레이쇼 씨콜(Horatio Seacole)이라는 백인남자와 연애 끝에 결혼했고, 그래서 씨콜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남편은 요절했고, 씨콜은 재혼하지 않았다.
씨콜의 지식과 경험을 높이 산 자메이카 당국은 씨콜에게 군대에서 병원을 운영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씨콜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Wonderful Adventures of Mrs. Seacole in Many Lands
By Mary Seacole (1805-1881). London: James Blackwood Paternoster Row, 1857.
그러던 중 크림 전쟁이 터졌고, 나이팅게일의 명성이 알려졌다. 씨콜은 자신의 의학지식과 병원운영 경험이 유용하게 쓰이리라 생각하고 영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영국에 도착했을 때 나이팅게일은 이미 크림으로 떠나고 없었지만, 계속 지원자를 받고 있어서 씨콜은 면접을 신청했다. 그러나 빈자리가 없다는 말과 함께 퇴짜를 맞고 말았다. 씨콜은 훗날 이 면접을 회고하면서 "설사 빈자리가 있었어도 뽑히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나는 탁자 건너편에 있는 얼굴에서 읽었다"고 자서전에 쓰고 있다. 흑인 간호사는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씨콜은 포기하기 않고 자기 돈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나이팅게일이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이팅게일의 병원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씨콜은 아예 흑해를 건너 크림반도로 갔다. 크림 반도에서 씨콜은 나이팅게일의 병원으로 후송되기를 기다리는 부상병들을 돌보았다. 씨콜의 활동에 깊은 인상을 받은 해군 장교들이 제독을 졸라서 아예 항구에서 씨콜이 부상병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조처해 주었다. 씨콜이 일하던 곳은 항구와 최전선을 연결하는 길가에 있어서 한쪽으로는 병사들이 전쟁터를 향해서 행진하고 다른 쪽으로는 부상에 신음하는 병사들이 무시무시한 의사의 메스를 향해 실려갔다. 씨콜은 병사들을 돌보고 약을 팔기도 했다. 단 돈을 낼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만...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는 무료로 나누어 주었고...전장에서는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었고, 씨콜의 특효약, 즉 계피를 넣고 펄펄 끓인 물이 큰 효과를 보아서 많은 사람을 살려냈다.씨콜은 병사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고위장교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씨콜이 크림에서 일할 때 이미 40대 후반의 나이였고 뚱뚱한 몸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고 헌신적으로 병사들을 돌보았다. 자서전에서 씨콜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병사들)은 나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이것은 의미가 없지 않았다. 나는 그 낱말 속에 자기 집처럼 편안한 그 무엇이 들어있음을 좋아했다. 독자들은 병사들에게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자기 집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생각할 수 없다." 씨콜의 활약으로 숱한 병사들이 목숨을 구했다. 그러던 중 크림전쟁이 끝났고, 씨콜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런 사정을 안 영국의 한 잡지사가 씨콜을 돕자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돈을 모으기 위해 노천에서 연주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사람들은 씨콜을 무등을 태우고 돌아다녔다. 열광한 군중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씨콜이 깔려 죽을까봐 힘센 병사들이 씨콜을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씨콜이 할머니가 되어 죽을 때까지 씨콜이 사는 집에 들러서 목숨을 구해주어 고맙다고 말하면서 포옹과 키스를 퍼붓는 군인들이 끊기지 않았다.
물론 크림 전쟁이 끝난 뒤 나이팅게일은 국민영웅이 되어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씨콜 역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나이팅게일 못지 않은 유명인사였다. 세월은 흘러흘러갔다. 나이팅게일은 여성에게 족쇄를 채워 가정에 붙들어 두는 숨막힐 듯한 빅토리아 시대에 여성의 지위를 높이고 여성이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통로를 확보한 인물로 계속 기억되었다. 그러나 씨콜은 어떠한가? 백여년이 흐른 뒤 아무도 씨콜을 기억하지 못한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두 사람 다 헌신적으로 병사들을 돌보고 두 사람 다 죽을 운명에 처한 병사들을 숱하게 되살렸는데...나이팅게일이 후방에서 일한 데 비해 씨콜은 전선에서 병사들을 보살폈는데...병사들 사이에서 나이팅게일이 "램프를 든 숙녀"로 불렸다면 씨콜은 "어머니"로 불렸는데...씨콜은 자서전까지 펴냈고, 당시에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했는데...그런데 왜 백년이 지난 뒤 나이팅게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씨콜을 기억하는 사람은 극소수일까?
나이팅게일은 여론의 각광을 받으면서 관심을 계속 끌만한 이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나이팅게일은 부유한 명문가 출신의 숙녀로 특권층에 속한 인물이었다. 나이팅게일에게는 신분에 걸맞게 권력을 쥔 친우들이 있었다. 나이팅게일이 크림전쟁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쟁부의 최고위관리를 지내고 있던 친구 시드니 허버트(Sidney Herbert)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 나이팅게일은 권력의 장에서 노련하게 행동할 줄 아는 정치감각의 소유자였다.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 당시 미혼의 숙녀였고, 무엇보다도 백인이었다.
반면 씨콜은 무명의 변방인이었고 변변치 못한 집안 출신이었다. 씨콜은 미모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다만 뚱뚱한 몸매의 마음씨좋은 과부아줌마였다. 무엇보다도 씨콜은 유색인종이었다. 이런 차이가 기억과 망각의 선상에서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최근에야 비로소 씨콜은 영국을 빛낸 인물로 영국인의 관심을 받고 있다. 영국 내에 거주하는 인도계, 파키스탄계, 흑인계 소수민족이 영국 사회에 융합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가는 가운데, 유색인종으로 과거에 영국사회에 이바지한 인물들이 새로운 조명을 받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An extract from a poem published about Mary Seacole in Punch Magazine (6th December, 1856)
She gave her aid to all in need
To hungry, sick and cold
Open hand and heart, ready to give
Kind words, and acts, and gold
And now the good soul is "in a hole"
What soldier in all -the land
To set her on her feet again
Won't give a helping hand?
시콜의 묘비
참고 글 출처 : http://digital.library.upenn.edu/women/seacole/adventures/adventures.html
http://cafe.daum.net/shogun/9xm/3367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20X1040779
http://www.spartacus.schoolnet.co.uk/REseacol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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