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韓國 全州의 地形 및 名稱과 유사한 곳이 中國에도 있다.
桂林 市街地에서 북쪽으로 약120km 떨어진 곳에 位置한 全州縣은 韓國의 全州市와 地名, 山 이름, 生活風習도 全部 똑같다. 역시 廣西壯族自治區의 南寧 近處에는 <百濟墟>라는 옛 百濟人이 만든 성터도 있다고 한다. 만약 湖南省 衡陽에서 廣西自治區 桂林을 통해 全州로 간다면 中國內에서 가장 韓國과 닮은 地形을 볼 수 있다.
百濟人들은 과연 언제, 어떻게, 왜 이 먼 곳까지 왔을까?
잃어버린 百濟를 찾아서….
이 같은 연관성은 결국 주민 이동이란 상황을 설정하게 되는데 주목 되는 사실이 中國의 全州라는 명칭이 939년에 시작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後百濟가 멸망하고 3년 뒤의 상황으로 이 지역이 後百濟와 가장 밀접하게 대외 교류를 진행하였던 오월, 후당 지역과 바로 연결된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는 後百濟가 붕괴되기 전 이미 활발한 해상교류가 현재의 浙江省 해안지역 등에서 진행 되었고 과거 新羅坊 등과 같은 거점이 유지 되다가 後百濟 붕괴이후 체류민 및 後百濟 유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들 중 일부가 당시 그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던 초왕 마희범과 연결되어 “全州” 명칭이 연결 되었고 이후 이 지역에 상기한 것과 같은 여러 명칭과 殘影을 남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되고 있다.
◆ 中國 廣西自治區 桂林市 全州縣 全州地圖에 나타난 完山
1) 完山, 기린산 등 동일지명의 존재
中國 全州에 존재하고 있는 지명중 주목 되는 것은 完山의 존재이다. 이는 全州앞을 흐르는 상천강 건너편에 존재하는 산으로 지표표고 약 50m 정도의 높지 않은 산으로 全州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산이다.
또한 더욱 주목 되는 것은 全州에서 完山을 바라볼 때 좌측에 全州를 완벽하게 조망하고 감제할 수 있는 기린산이 존재하고 있는 점이다. 이 산 정상에는 진상탑이 세워져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데 韓國 全州의 양상과 거의 동일한 상황이다.
이 같은 내용은 청나라(淸代) 때 만들어진 全州 풍수관련 지도에 잘 나타나있고 全州를 둘러싸듯이 강이 흐르고 있으며 강 건너편에 完山이 존재하고 完山 바로 위의 산이 기린산으로서 특히, 이 산은 全州와 관련 되어 홍수 등 자연 재해를 막기 위해 지역민들이 모여 기원하는 제사처로서 기능하는 곳이다.
이를 계승한 것이 현재 산 정상에 존재하고 있는 鎭湘塔으로 韓國 全州의 기린봉이 갖는 종교적 기능과 매우 흡사함을 보여주고 있다. 즉 韓國 全州의 기린봉은 과거 성황사가 그곳에 위치하여 全州 지역민들의 안녕과 개인적 기원사항을 빌던 곳으로 전주를 감제하는 진산적 성격의 산으로 中國 全州의 양상과 매우 흡사하다.
2) 金山寺의 존재
中國 全州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金山寺의 존재이다. 金山寺는 韓國의 경우 全州와 관련되어 가장 중요한 사찰로 특히 眞表에 의해 미륵 점찰 도량으로 성장한 湖南 최대의 사찰중 하나이며 後百濟時期 견훤왕의 원찰과 같은 사찰이었다.
특히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되기도 하였던 사찰로 후백제를 상징하는 사찰로서 전주와 함께 기억될 존재였던 것이다. 이 같은 금산사의 명칭이 중국 전주에서도 나타나 있다.
中國의 金山寺는 中國 桂林市 全州縣 塘鄕 金山村에 존재하고 있는데 우선 淸代에 제작된 고지도에 나타난 금산사를 보면 金山寺와 金山寺官이란 명칭이 두 군데에서 확인되고 있고 金山寺에 대한 현재의 기록은 全州縣 유적지가 존재함을 확인 시켜주고 있다.
3) 中國의 全州 총도에 보이는 金山寺
1930년대 國民黨 군대의 군 주둔지와 병원으로 사용되었고 文化革命 시기에 毁破되어 최근까지 학교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방치되어 있다. 주목되는 점은 사찰관련 비석들이 파손되어 학교건물 건축자재로 사용되고 있는 점이다. 또한 사찰영역 초입에 우리의 석장승 형태의 석조물이 “南無阿彌陀佛”이란 명문을 몸체 돌에 새긴 채 길옆에 세워져 있어 매우 흥미롭고 그 지역민들은 이것의 용도와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어 아쉬웠지만 金山寺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검토해야 할 자료이다.
사찰뒤의 부도탑에서 “臨濟正宗 37世 嗣祖沙門 金山歸一和尙”이란 명문의 비석을 확인할 수 있고 파손된 비문 중 “千載之後”라는 표현을 찾아내어 적어도 이 사찰의 연원이 천년이상의 것이고 金山寺의 연원이 천년정도의 내력을 갖는다면 이는 後百濟가 붕괴되고 이 지역에 全州라는 지명이 사용되기 시작한 939년의 연대와 같은 시점이라는 것이다.
지명에 있어 全州뿐만 아니라 全州縣에 完山, 기린산 등 韓國 全州에 존재한 대표적인 산의 명칭뿐만 아니라 이곳 지세와 유사한 배치양상을 보여주고 있고 우리의 전통적인 솟대신앙이 동일한 형태의 신앙과 조형물로 남아있으며 제사에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구리북에 남겨진 문양의 경우 우리의 청동기시대 이래의 일광경 모습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이 같은 관련성을 더욱 뒷받침 해주고 있다.
百濟 장군 黑齒상지가 중국 최남단 광시(光西) 좡(壯)족 자치구의 바이지(百濟·백제)향 출신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곳 사람들은 아직도 百濟라는 지명을 쓰고 “大百濟”라고 발음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신무”라는 廣西의 少數民族이 즐겨먹는 무 초절임은 무에다 식초와 설탕을 넣어 만들지만 韓國 동치미의 맛과 정말로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몇 년 전 KBS 全州방송국에서 만든 “中國속의 全州”라는 다큐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한국방송 모 PD 가 2002년 낸 “中國에도 全州가 있다.”라는 책에서 후백제의 도읍지였던 全北 全州와 中國 東南部 全州라는 곳의 연관성을 파헤쳐 百濟의 中國 진출을 증명하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시사 관심꺼리 > 정치군사사회역사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의 대국굴기와 일본의 품격사이에 대한 김창혁논설의원의 글 (0) | 2007.02.04 |
---|---|
대국굴기,강대국의 흥망성쇠에 관한 중국 CCTV의 다큐 (0) | 2007.01.15 |
[스크랩] “동북공정”의 산실 -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센터를 찾아서... (0) | 2006.09.30 |
중국의 동북공정, 내부문제 외부로 눈돌리기 전략인가 (0) | 2006.09.24 |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하여 (0) | 2006.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