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씨를 붓뚜껑에 넣어 몰래, 그것도 밀수 한것처럼 다뤄지고 있는 진실에 대해 디벼볼까 합니다.
목화는 신라시대 때부터 있었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양서(梁書) 등 고문서를 보면 ‘백첩포(白疊布)라는 면이 자생한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삼우당(문익점)어른이 붓뚜껑에 넣어 밀수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주머니에 가지고 들어온 목화는 원나라에 널리고 널린 목화씨였고, 문익점이 목화를 전해준 선구자로 지금까지도 칭송받는 것은 그때까지 더운지역의 목화를 온대지방인 한반도에서 재배하는 기술이 없었기에 그런 것입니다.
즉, 문익점에 의해 중국의 목화가 한반도에서도 생산, 성공한 것입니다. '붓뚜껑에 몰래 반입' 했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문중의 후손들에 의해 정치적 미화로 쓰여진 것입니다.
삼우당 문익점 공의 생애를 알아봅시다.
문익점은 1363년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결코 귀양을 간 것이 아닙니다.
서장관은 정사, 부사와 함께 삼사로 불리우는 중요 외교직책으로, 사절단의 행적을 기록하는 관직이기도 합니다.
<고려사>의 문익점 열전에 의하면,
"문익점..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얻어와서..."라고 기록되어 있고 조선 <태조실록>에는 "문익점이 사망하였다..(중략)그는 원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 10여개를 주머니에 넣어서 가지고 와..(후략)" 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태 알아왔듯이 '붓뚜껑'이 아니라 주머니에 자연스레 넣어 돌아온 것이죠.
이 외에 동시대의 어떠한 문헌을 봐도 그가 목화씨를 붓뚜껑에 넣어 밀수(?)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거 저도 한 때 역사사이트에서 만난 분하고 이야기 하다가 열받아서 국립도서관에 자리깔고 뒤져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문익점은 원에 귀양을 갔다는 말이 생겼으며 목화를 몰래 들여왔다는 말이 생겼을까요?
당시 목화는 원나라의 '반출 금지 품목이 아니었다' 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당시 사방에 널리 퍼져있던 목화가 결코 희귀품이 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어떠한 문헌에도 원나라의 대외 '반출금지품목' 에 목화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문익점이 원나라에 갔을 때 원과 고려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던 때입니다. 공민왕의 적극적인 반원 정책에 불만을 느낀 원은 고려가 홍건적의 침입을 받아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공민왕을 폐합니다.
이후,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해 고려에 보내는데 당시 고려에 있던 관리들은 공민왕과 덕흥군 중 한명을 택해 왕으로 섬겨야 했습니다.
과거에도 이러한 경우가 있을 때마다 원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대다수의 관리들은 이번에도 덕흥군의 편에 섰고 문익점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원의 지지를 받은 덕흥군이 최영과 이성계의 고려군에 패하면서 문익점은 역신이 되어 버리고 원나라에 기대어 목숨을 부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처하게 됩니다.
허나, 무슨 이유에선지 문익점은 공민왕 13년 이공수와 고려로 돌아왔고 다행히 파면에 그치는 죄값을 치루게 됩니다. 파면후 그는 고향인 진주로 내려가 원에서 가져온 목화를 시험 재배하였는데, 10년이 채 안되어 전국에 목화씨를 보급할 정도로 성공을 거두게됩니다.
이후에는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빼는 '물레'를 만드는 법을 익혀 의복에 혁명을 가져다 주게 됩니다. 이러한 혁명이 일어나면서 그에 대한 신화 역시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가 강남에 귀양갔다가 강남에서 나는 '목화씨를 붓뚜껑에 숨겨 몰래 반입하였다'는 설입니다.
그러나 문익점은 강남에 가본 적도 없고, 그가 당시 들여온 것은 강남산이 아닌 강북산입니다.현재 우리 나라의 목화는 다년생의 강남산 목화가 아닌 1년생 초면인 강북산인 것입니다.
문익점에 대한 지금의 기록이 전면적으로 부각되는 것은 그로부터 500년 후인 순조 19년, 그의 후손인 문계항 등이 편찬한<삼우당실기> 와 <정조실록>에 실린 전라도 유생 김상추의 상소문에 의해서 입니다.
상소에서,
"문익점은 사명을 받들고 원에 들어갔는데 원에서 공민왕을 폐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고 하자 이에 수긍할 수가 없다고 하여 결국 강남으로 유배되었습니다. 3년 만에 비로소 돌아온 그는 중국에서 목면을 '몰래' 들여와 백성들에게 이롭게 한 사실이 이와 같습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공민왕을 배반하고 덕흥군에 붙었던 그가 공민왕에 충성하려다 유배당한 것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조상을 아름답게 미화하는 것이 조상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하는 역사 왜곡의 한 단면입니다.
그는 목면 보급의 공을 인정받아 우왕 때 다시 벼슬을 하였으나, 사전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자리에 섰다가 역성혁명파의 탄핵을 받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렇듯 그는 정치적으로는 불우한 삶을 살았지만 '목면보급의 공'을 인정받아 목숨까지 잃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붓뚜껑의 이야기는 말그대로 후대에 미화된 이야기일 뿐이지만 척박한 땅에 목면보급을 성공시켜 의복혁명을 이루신 선생의 공덕은 후세에 아름답게 전해져야 하겠습니다.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고문서 뒤적일 필요없이 상명대 박선희 교수의 책을 일독해 보시길 바랍니다. 옛 복식 연구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니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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