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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풍요롭게/철학 종교일반

정민 교수-한양의 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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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이야기' 통해 연암과 에코 만나기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는 '장미는 예로부터 그 이름으로 존재해 왔으나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락한 이름뿐'이라는 구절이 있다. 사물은 온데 간데 없고 기호만이 남았음을 지적한 표현이다. 그 책에서 에코는 낙타를 예로 들어 이미지 자체에 생동하는 힘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연암 박지원은〈상기〉(象記)에서 코끼리를 예로 들어 기호학적 논리를 펴나간다. 소나 개, 돼지 따위만 보아온 시골 사람의 눈에 난생 처음 보는 덩치 크고 코와 어금니가 희한한 코끼리의 모습은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와도 같다. 그럴 때 사람들은 흔히 '하늘의 이치'니 '하늘의 법칙'에 손쉽게 의지하지만, 연암은 사실 이러한 것들 역시 인간이 지어 낸 허상에 불과하고 말한다. 천변만화하는 현실을 기존의 이치 안에 가두려는 시도를 경계하는 것이다. '사물들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상기〉를 통해 연암은 획일화된 가치 척도로 세계를 규정하고자 하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거부의 뜻을 담습니다. 우연히 만난 코끼리를 앞에 두고, 인간의 사변적 지식이란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만고불변의 진리란 것이 어째서 이토록 허망한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지요."

정 교수는 조선 후기 문장이론 전공이다. 비유나 상징이 많아 까다롭다고 여겨지는 연암의 글이나 해석이 난해한 한시도 그의 손을 거치면 고운 숨결을 가진 글이 된다.『비슷한 것은 가짜다』와『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한시미학산책』,『마음을 비우는 지혜』등의 저서를 통해 지루하고 따분한 것으로만 여겨졌던 한문학을 과거의 영역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현대적이고 세련된 감각으로 되살려 '지금 여기'를 해석할 수 있는 틀로 내어놓았다.

"'지금 여기'의 작품을 고전문학을 해석하는 틀로 이해하는 것은 과거와 현대 사이의 막힌 물꼬를 트기 위한 시도입니다. 한시의 방법론을 가지고 미당과 목월의 시를 분석한 적이 있는데, 이는 현대시의 관점에서 이들의 시를 분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었지요. 이처럼 현대시도 한시의 틀로써 읽어낼 수 있는 코드로만 바꾸어주면 과거와 현대가 충분히 소통될 수 있게 됩니다."

정 교수가 연암의 <상기>를 통해 에코를 불러들인 것은, 우리 나라에도 기호학이 있다고 뽐내는 마음 때문이 아니다. 삶의 본질, 의식의 본질은 시대가 흘러도, 지역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는 정한 이치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우리의 문학을 지나치게 서구의 틀로만 해석하려는 태도에 대한 안타까움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작년에 출간한 『비슷한 것은 가짜다』는 7년을 공들여 탈고한 책이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라는 제목은「녹천관집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연암은 "비슷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진짜는 아닌 것이다. 천하에서 이른바 '꼭 닮았다'거나 '진짜 같다'고 말할 때는 그 말 속에 가짜라는 것과 다르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옛날을 모방할 때 그 정신을 본받아야지 겉모습만 본뜨려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슷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진짜는 아닌 것이다(求似者, 非眞也)"라는 원문은 연암의 예술론을 집약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책을 출간 후에 '어렵기로 유명한 연암의 글을 유려한 우리말로 풀어낸 솜씨가 뛰어나다', '지금 여기에 뿌리를 두고 삶의 진실을 노래한 문학만이 가치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연암의 글에서 오늘날의 문화현상을 포착해 내고 해결방향도 찾을 수 있다' 는 등의 호평을 받았다.

"21세기 오늘을 사는 사람으로서 18세기나 그 이전 시기의 '그때 거기'를 공부하는 것이 '지금 여기'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면서 쓴 글입니다. '그때 거기'의 가치를 '지금 여기'에 어떻게 환원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우리 시대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해명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문제는 힘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 힘있는 가장 큰 목소리 중의 하나가 연암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암과의 만남이 내 학문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의미를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간 직후 한 인터뷰에서 정 교수는 "서구 담론이 무너진 후 문화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대체 담론으로서 연암의 문예미학과 예술론을 소개하고 싶었다"는 의도를 밝혔다. 정 교수는 연암이 '그 때 거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를 추구함으로써 옛것을 통해 끊임없이 현재의 삶을 살찌워 나갔다고 강조했다.

연암의 글은 고도의 비유와 상징, 함축으로 이루어진 문맥을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인식되어 왔다. 연암의 깊은 사유를 접할 수 있는 <연암집>은 아직도 번역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교수는 300년이라는 시공을 초월하여 연암과 대화하고 산책하면서 그의 숨결을 통찰력 있는 언어로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시대에 맞는 글을 써야 한다"

정 교수는 연암의 힘은 글쓰는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옛것을 고정된 가치, 불변의 가치로 생각하고 그것과 가까이 가도록 노력하는 것만을 가치 있다 여겼는데, 옛것이라는 관념을 과감히 바꾸는 생각의 유연함이 연암이 가진 진정한 힘이다.

"우리는 고전적인 가치를 지닌 것들을 창출하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이 방법은 옛것을 모방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의 이백이나 두보, 사마천이 되기 위해서는 사마천이나 이백, 두보를 열심히 배우고 따라할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요구하는 목소리를 만들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마천이며, 이백이고 두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맞는 글을 써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고전을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 시대의 목소리를 만들 수 있어야만 고전이 됩니다."

변화는 용기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새로운 소리를 내기보다는 옛 소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과거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수도 있다. 정 교수는 이러한 나태한 생각들에 일침을 놓는다. 과거의 것을 묵수하고 고수하는 것만이 고전이 아니라, 자기 시대에 맞는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설령 시련과 도전의 과정일지라도 자기 목소리를 찾아 낼 것을 강조한다.

한국문장이론 역사 정리 작업에 몰두

정 교수는 요즈음 한국문장이론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에 골몰하고 있다. 한국문장이론에 관한 자료집을 번역한 것인데, 구한말까지의 문장에 관한 자료를 모두 모아 놓은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서 그는 글쓰기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여 한국형 문장이론을 집필하고, 나아가 동양적인 것으로 과거의 문장론을 오늘화해서 보여주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이 작업은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화두에 놓고 있습니다. 글쓰기에 관한 다양한 글들을 모아 놨지요. 사실 서구의 글쓰기는 기법 중심이라 지나치게 형식주의 작문이론에 치우쳐 글쓰기의 기교만을 길러주었습니다. 그러나 동양의 글쓰기는 활법 중심입니다. 살아있는 글이지요."

또 한두 편씩 모아 놓은 금언시를 보다보니, 새에 대해 부쩍 애정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이를 단순히 시와 해석만 소개할 것이 아니라, 새와 관련된 시문을 보여주고, 그림이나 사진 등을 도판으로 보여주는 책을 출간할 계획도 세워 놓았다.

"회화, 조류학, 한문학, 문학연구자, 어린 청소년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작업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한문학 자체만을 연구한 것이어서는 안되겠지요. 한문학이 의미를 가지려면 '지금 여기'에 위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고전문학이나 한문학이 과거에 뿌리를 둔 작업이기는 하지만, 연구자가 이를 어떤 생각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새에 관한 모든 자료를 모으다 보니, 이제는 새소리만 들어도 (실제로 요즘 정교수는 차 속에서 새소리 테이프를 듣고 다닌다) 이게 무슨 새로구나, 알 수 있을 만큼 귀가 트였다. 지금껏 모아 놓은 자료가 새에 대한 외곽을 형성하는 개념이 될 것이다.

정 교수는 그것이 국문학자들에게보다 조류학자들에게 오히려 폭발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끊임없는 집필로 지칠법할 때에도 정 교수의 얼굴에는 그다지 피곤한 기색이 없다. 책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유려한 글로 풀어내고 있을 때에는 오히려 놀이하는 꼬마처럼 신나는 표정이 스치기도 한다.

고전은 인간의 체온을 가진 정보

한문학은 선조들의 삶의 갈피를 하나하나 들춰내는 작업이다. 속도가 생명이라는 디지털 시대에 과거를 되짚어 고전을 연구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작업일까.

"디지털 시대에는 모두 새롭고 빠른 것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신이 부재한 것이기가 쉽지요. 인간의 정신이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기본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과거는 바로 당시의 현재요 순간이지요. 당시의 글들이 시대를 뛰어넘어 사람에게 감동과 떨림을 주는 것은 바로 고전이 갖는 힘입니다. 고전은 디지털 문화와 달리 인간의 체온을 실어 나를 수 있는 힘을 가졌어요."

과거에는 시집가는 딸에게 혼수로 주기 위하여 온 가족이 밤을 새워 소설을 필사하는 것이 흔한 풍경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중요한 혼수품의 하나가 필사본 소설책이었다.〈임경업전〉을 시집가는 딸에게 필사하여 주며, 아버지가 책의 말미에 적은 '네 아비가 생각날 적에 보아라'라는 짧은 사연은 인터넷상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정보에서도 주지 못하는 감동을 준다. 인간의 체온을 가진 정보, 정 교수는 그것이 바로 고전이 주는 힘이라고 믿는다.

정 교수의 연구실 한 켠에는 삼단으로 된 둥근 자료집이 있다. 커다란 원통형의 그것에는 빼곡이 파일이 꽂혀 있는데, 정 교수는 이를 두고 '종자 모음'이라고 표현했다. 필요한 정보를 모아 분류해 놓다 보면, 그것이 다 책이나 논문의 종자로 소용에 닿는다고 했다.

그러나 파일에 담긴 어떤 정보나 자료보다도,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는 정 교수의 노력이 '그 때 거기'와 '지금 여기'의 닫힌 물꼬를 트는, 고금을 소통시키는 가장 중요한 종자가 되고 있다.

* 학력 및 경력사항

학력
1979.3-1983.2 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국어국문학과
1983.3-1985.2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문학석사)
1985.3-1990.2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문학박사)

경력
1995.3 - 현재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1997.3 - 현재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사장
1998.9 - 1999.8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교환교수
1999.9 - 현재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과장

학회활동
1987.8-1992.7. 한국도교사상연구회 총무이사
1993.8-1994.7. 한국도교사상연구회 편집이사
1993.3-1995.3. 한국한문학회 출판이사
1995.3-1997.2. 한국한문학회 연구이사
1997.3-1999.2. 한국한문학회 섭외이사
1995.11-1997.10. 한국18세기학회 섭외이사
1999.3- 현재 한국도교문화학회 섭외이사
1999.5- 현재 한국시가학회 섭외이사

대표 저서
《朝鮮後期 古文論 硏究》. 亞細亞文化社. (1989년)
《꽃피자 어데선가 바람불어와》. 교학사 (정민·김도련 공저, 1993년)
《한시미학산책》. 솔출판사. (1996년)
《숲 속의 문화 문화 속의 숲》. 열화당(14인 공저, 1997년)
《마음을 비우는 지혜》. 솔출판사 (1997년)
《鳴皐詩集》. 태학사. (1997년)
《한국고전비평자료집》. 태학사(정민·조남권 공역, 1998년)
《목릉문단과 석주 권필》. 태학사. (1999년)
《비슷한 것은 가짜다》. 태학사. (2000년)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열림원. (2000년)
《돌위에 새긴 생각》. 열림원. (2000년)

논문 : 국내 50여 편
〈고전문장이론에서 '법'의 문제에 대하여〉. 《고전문학연구》 제 15집. 한국고전문학회. 〈16.7세기 당시풍에 있어서 낭만성의 문제〉. 《한국시가연구》 제 5집. 한국시가학회 외 국내 50여 편


출처 : http://www.hanyang.ac.kr/top_news/2001/200103/1_to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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