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차문화와 大慈寺
釋大恩(중국 大慈寺 주지)
불교는 한대(漢代)에 중국으로 전하였으며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를 거쳐 수당(隋唐)시기에 전성기에 이르렀다. 당대에 중국 차(茶)문화를 창립한 육우(陸羽·727~803?)는 어렸을 때 지자(智者)선사가 수양하여 후에는 유명한 시승(詩僧) 교연(皎燃)스님을 만나 생사를 같이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육우의 『자전(自傳)』과 『다경(茶經)』에는 불교에 대한 찬양과 선승(禪僧)이 음차를 좋아하는 기록이 있다. 그리하여 중국 차문화는 싹이 트면서 불교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성도(成都) 대자사(大慈寺)는 위진 연간에 보장(寶掌)선사가 아미(峨眉)와 보현(普賢)을 참배하고 대자사로 오면서부터 당대의 무상(無相)선사에 이르기까지 대자사에 주석하여 선다법(禪茶法)을 행한 이래로 선과 차를 같이 논하였고 동등하게 보았는데 이것이 바로 세인들이 알고 있는 '선다일미(禪茶一味)'이다.
불교의 품차(品茶), 다기(茶技). 다도(茶道)에 대한 공헌
위진 이전에 찻잎은 이미 승려들이 수도하거나 생활하면서 평상시에 사용하는 음료가 되었다. 특히 중당시기에 사찰마다 차나무를 심으면서 승려들마다 차를 마시는 풍습이 있었으며, 각 사찰의 승려들과 역대 명승들은 사적(史籍)에 많은 차사(茶史) 자료를 남기었다.
사찰에서는 찻잎을 중시했고, 좋은 찻잎을 생산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하였다. 그리하여 다성(茶聖) 육우도 절에서 차에 대한 초보적인 요해(了解)를 얻고 흥취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다경(茶經)』, 『다가(茶歌)』는 육우와 교우를 나누었던 교연스님이 창작하였다. 교연스님은 일찍이 『다결(茶訣)』을 썼으며 차에 대한 공능(功能)과 자음(煮飮)예술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당대의 공차원 혹은 공배(貢焙)에는 고저 '상길상원(上吉祥院)'이 설치되었다. 사찰에는 모두 찻잎을 연구하고 품질을 높이고 찻잎을 보급할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특히 사찰의 방장(方丈), 선승들은 문화를 가지고 있어 종차(種茶), 제차(制茶), 품차(品茶)하고 자주 관리와 부호(富豪), 명인들과 왕래하였다. 선사(禪寺)는 보통 환경이 우아한 명산에 자리 잡고 있어 선사의 굵쨉湧?품명(品茗)하고 시를 지어 선차문화를 선양할 우선적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에는 이전부터 '예로부터 이름난 사찰에는 이름난 차가 나온다〔自古名寺出名茶〕'라는 말이 전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당대의 이조(李肇)의 『국사보(國史補)』중에 일부 명차를 기록하고 있으며 복주(福州)의 방산녹아(方山露芽), 검남(劍南)의 몽정석화(蒙頂石花), 악주(岳州)의 읍호함고(邑湖含膏) 등 진품(眞品)은 모두 사찰이나 사찰승에 의해 나왔다. 근대의 많은 명차는 사찰 혹은 승려와 관계된다. 그 예로 몽정차(蒙頂茶), 아미모봉(峨眉毛峰), 죽엽청(竹葉靑) 등이다. 승려들의 차에 대한 수요는 확실히 찻잎의 생산발전을 추진하고 다도(茶道)에 물질적인 기반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차는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상호 촉진적인 관계이다.
선종 및 불교 각 종파의 좌선은 다섯 가지 조화〔五調〕에 유념하고 있다. 즉 조식(調食), 조수면(調睡眠),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이 그것이다. 특히 잠을 조절하는 데는 음차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정좌 참선 중에 머리가 청정해지고 잠을 극복하는 데 제일 좋은 음료가 바로 차이기 때문이다. 승려들은 절에서 염불. 좌선, 공양. 휴식, 음시(吟詩) 등 일상에서 차를 떠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당대의 조주(趙州) 고승 종심(從?)선사의 화두가 바로 '차 한잔 들게나〔喫茶去〕'였던 것이다. 불교는 차문화를 흥성하게 하였고 세계각지로 전해지게 하였다. 불교는 품차(品茶)의 내실을 기하게 했고, 일본에서는 다도(茶道), 한국에는 다례(茶禮), 중국에서는 다예(茶藝) 혹은 다기(茶技)로 발전했다.
불교문화에는 차문화가 아주 깊숙이 융합되어 있다. 불교는 품차에 '선과 차는 하나이며 심신을 함께 닦는, 선차일미 심신공수(禪茶一味 身心共修)'의 철학사상을 제공하였고 품차의 사상적 내실을 진일보 심화하여 차문화에 신비롭고 고상한 운치〔神韻〕를 부여했다.
차는 시사(詩詞)의 제재이나 시사에는 선(禪)이 없고 무영(無靈), 무경(無境)이다. 품차는 문지도(文之道)로서 선지이(禪之理)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선은 차의 중심이고, 차는 선의 표상(表象)이다. 선과 차가 공동으로 추구하는 것은 마음을 바라보는 것, 깨달음에 있으며 자아수행이고 생명조화에 있다. 선차일미(禪茶一味), 신심공수(身心共修), 여수광산영(如水光山影), 수유상용(水乳相溶),자연천성(自然天成)인 것이다.
대자사(大慈寺)의 선차(禪茶)
성도 대자사의 당대(唐代) 조사는 신라왕자로서 출가한 무상선사(無相禪師)이다. 참선, 품차(品茶)를 하는 기나긴 과정에서 '무상선차지법'을 개창하였으며 선차문화에 매우 큰 공헌을 하였다. 대자사에서 참학(參學)과 강경(講經)을 한 송대(宋代)의 불과 극근(佛果克勤·1063~1135)선사는 선차문화를 간접적으로 일본에 전했다. 『신선소각사지(新選昭覺寺志)』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승인 무라다쥬코우(村田珠光·1442~1502)가 중국에 와서 불과 극근선사를 참배하니 선사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하고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묵보(墨寶)를 증송하였다고 한다.
무라다쥬코우는 귀국하면서 태풍을 만났는데, 대나무통 안에 "다선일미" 묵보를 넣고 밀봉한 것이 물에 떠돌아다니다가 일본 본주(本州)의 강변에서 일휴화상(一休和尙)에게 발견되어 후에 경도(京都)의 대덕사(大德寺)에 보관되었다. 일본 승려들은 이 묵보를 보고 깨우치고 조사(祖師)의 오지(奧旨)를 발휘하여 후에 『선다지도(禪茶之道)』를 저술하면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13세에 대자사에서 출가한 송대의 고승 도융선사(道隆禪師)는 더욱 직접적으로 선차문화를 일본에 전했다. 송(宋) 순우(淳佑) 6년(1246년)에 도융선사는 몇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가서 건장선사(建長禪寺)를 창건하고 일본의 선종체계를 건립하였다. 열반 후에는 천황으로부터 대각선사(大覺禪師)라고 봉해졌는데, 이는 일본이 선사라는 호를 쓰게 된 시작이다. 도융선사의 도일(渡日) 700주년을 기념하여 1986년 4월 25일에 일본의 건장선사를 비롯한 19개 사찰의 대표들이 중국 성도에 와서 대자사 조정(祖庭)을 참배하였다.
"선다일미(禪茶一味)"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시 자신이 직접 실천, 체험하여 느껴야 하며, 차시(茶詩), 차대련(茶對聯)의 풍미를 통하여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예컨데 송대 대자사 보월대사(寶月大師) 유간(惟簡)과 뜻을 같이 했던 대문호 소동파(소식)는 선차(禪茶)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茶笋盡禪味 차잎은 선미를 다하고
松杉眞法音 송삼은 참다운 법음이로다.
宋代苏轼 《参寥上人初得智果院会者十六人分韵赋诗轼得》 중에서
또한 이미 고인이 되신 조박초(趙樸初)선생님의 선시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七碗受至味 일곱 주발에 지극한 맛을 얻고
一壺得眞趣 한 병에 참뜻을 얻도다
空持百千偈 부질없이 백천게송을 가짐은
不如吃茶去 차 한잔 마심과 같지 못하도다.
마지막으로『금강경』에서는 이르기를,
一切有爲法 일체의 참 있는 법은 꿈같고
如夢幻泡影 꼭두각시·거품·그림자이며
如露亦如電 또한 이슬 같고 번개같거니
應作如是觀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어다.
이런 시와 게송을 읽으면 우리가 선(禪)을 하는 중에 차향을 들을 수 있고 음다(飮茶)하는 중에 선미(禪味)를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아미타불!- 월간 『선문화』04년 10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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