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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高仙芝) (? ~ 756.)
당나라에서 활동한 고구려 유민 출신의 장군,
▶ 국적문제
당나라 사진교장(四鎭校將) 고사계(高舍鷄)의 아들로서, 당나라의 사진절도사(四鎭節度使), 안서절도사 (安西節度使) 등을 지냈다.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는 자료로는 《구당서》, 《신당서》와 《자치통감》 등이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 고선지전에는 그를 명확히 고구려인이라 하였고, 또 《구당서》와 《자치통감》에는 선임 안서절도사 부몽영찰(夫蒙靈)이 고선지가 세운 전공을 시기한 나머지 ‘개똥같은 고구려놈’이라고 한 욕설에서도 알 수 있다.
호삼성(胡三省)이 《원화성찬 元和姓纂》에 의한 주(注)를 단 것을 보면, ‘부몽(夫蒙)’이라는 성(姓)은 본래 서강인(西羌人)이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중국에 동화된 이민족 사이에는 상대방을 욕할 때 종족적 멸시를 호칭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한 예가 호장(胡將) 안녹산(安祿山)과 가서한(哥舒翰) 사이에서도 보이는데, 그 기준은 한화(漢化)를 잣대로 하여 상대방을 업신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이, 고선지는 한화된 호장이나 또는 주변인으로부터 시기를 받을 만큼 그의 전공과 업적은 빛나고 있다. 그에 대한 시기는 마지막 참형을 당하였을 때도 배후에 깔리고 있는 듯하다.
▶ 초기의 역사기록
역사책에는 그가 말쑥한 용모로 무장답지 않게 수려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 사계는 그가 유완(儒緩)함에 늘 근심을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일을 처리하는 데는 영민하고 도량이 넓고 용감하여,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하서군(河西軍)에 예속되어 중급 장교로 있다가 사진교장이 되었다.
20여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안서로 갔다. 거기서 아버지가 세운 전공 덕분에 유격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곧 아버지와 같은 반열이 되었다고 하여,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모두 그를 보통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그가 안서군에 있을 때, 절도사 전인완(田仁琬) 및 개가운(蓋嘉運)은 그가 장차 큰 재목이 될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뒤 부몽영찰에 의하여 여러 차례 발탁이 되어 언기진수사(焉耆鎭守使)가 되었고, 개원(開元) 말에 이르러 병력 2,000을 거느리고 천산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가 되었다가, 곧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가 되었다. 때문에 그에 관한 초기의 사적은 주목 받을 만한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다.
[고선지의 서역원정도]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47년 소발률국(小勃律國)을 원정하고 돌아 온 뒤부터였다.
즉, 747년 토번(吐蕃: 티벳)과 사라센제국이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 팽창하던 당나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동진하자, 그는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에 발탁되어 토번족의 정벌 임무를 띠고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식닉국(五識匿國: 지금의 Shignan지방)을 거쳐 파미르고원을 넘어 토번족의 군사기지인 연운보(連雲堡)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계속 진격하여 험난하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힌두쿠시준령을 넘어서 소발률국의 수도 아노월성 (阿弩越城)을 점령하고, 사라센제국과의 유일한 교통로인 교량을 파괴하여 그들의 제휴를 단절하였다. 이 1차원정에서 불름(佛: 동로마), 대식(大食: 아라비아) 제호(諸胡)의 72개국의 항복을 받고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한 공으로, 귀국하여 홍로경어사중승(鴻卿御史中丞)에 오르고 이어서 특진겸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 2차 서역원정
750년 제2차원정에 나가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石國: Tasuhkent 부근)을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長安)으로 호송한 공으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그러나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석국왕을 참살하였기 때문에 이듬해 서역 각국과 사라센이 분기하여 연합군을 편성하여 탈라스(羅斯, Talas)의 대평원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막기 위하여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하여 제3차원정에 출전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와 동맹을 가장한 카를루크(葛邏祿, Karluk)가 배후에서 공격을 하여 오히려 패배하고 후퇴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탈라스전투’이다. 제2차의 탈라스원정에서 돌아오자, 당나라 현종은 그를 다시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에 전임시키고 우우임군 대장군(右羽林軍 大將軍)에 임명하였다. 755년에는 밀운군공(密雲郡公)의 봉작을 받았다.
그리고 이해 11월 안녹산이 범양(范陽)에서 난을 일으키자, 토적부원수(討賊副元帥)가 되어 출전하였다. 이때 그가 거느린 병력은 비기(飛騎), 확기와 삭방(朔方), 하서(河西), 농우(右) 등의 군대였다. 여기에다 증원군을 더 보충하기 위하여 경사(京師)로 가 5만명을 뽑아 선발군으로 나가 패전한 봉상청(封常淸)과 교대하였다. 반란군이 동관으로 향하여 쳐들어오자 방어 담당지역인 합주(陜州)를 떠나 동관(潼關)으로 무단 이동한 사실을,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던 부관 변영성(邊令誠)이 현종에게 과장하여 밀고함으로써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
고선지의 사적에 관한 자료는 《구당서》와 《신당서》의 <고선지 열전>이 있다. 이 두 문헌을 두루 살펴볼 때, 소발률(小勃律: 지금의 Gilghit부근)과 안서절도사 부몽영찰과의 관계 등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가 《신당서》보다 상세하다.
최근에 와서 프랑스의 동양학자 샤반느(Chavannes, Ed.)가 종래의 중국문헌 이외에 새로이 서방과 아랍 등의 문헌을 섭렵하여 고선지가 세운 탁월한 사적을 발굴해 내어 밝힌 《서돌궐사료 Documents Sur les Tou―Kiue Occidentaux》가 발표되면서부터였다.
또,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 슈타인(Stein)은 고선지의 전적지를 직접 답사하였다. 이들은 모두 고선지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천재적인 전략가로 평가하였다.
이와 함께 주목을 받은 것은 세계 최초로 섬유질의 제지법이 고선지에 의하여 유럽에 전파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즉, 751년 고선지가 제2차 탈라스전투에서 패하여 잡힌 포로 중에는 제지장(製紙匠)이 있었던 것이다.
고선지가 이룩한 빛나는 전적을 통하여 그의 뛰어난 지휘자로서의 통솔력과 전술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실이 발견된다.
① 서역에서 거둔 고선지의 탁월한 전과로서 소발률국을 토벌한 것,
② 당나라와 아라비아 두 나라가 석국과 탈라스성을 쟁탈하기 위하여 싸운 격전,
③ 탈라스전투 이후 제지법이 아라비아에 전파된 것,
다음은 百度百科에 실려 있는 고선지에 관한 내용이다.高仙芝
高仙芝①(?—756.1.24),高句丽人,唐朝著名军事将领。
高仙芝出身于将门之家。父亲高舍鸡,起初以将军在河西(指河西走廊及湟水流域)从军,后立军功,官至四镇十将、诸卫将军。高仙芝姿容俊美,善于骑射,骁勇果敢,但仍以其“儒缓”②而担心。少年时随亲父至到安西(治龟兹,今新疆库车东郊皮朗旧城),因父亲有功被授予游击将军。二十余岁时即拜为将军,并与父亲班秩相同。高仙芝先后在安西四镇节度使田仁琬、盖嘉运手下任职,未受到重用。后来夫蒙灵詧担任节度使时,发现了高仙芝的才干,从此不断提拔重用。詧发现了他的才干,一再提拔重用。到了开元末年,高仙芝已官至安西副都护、四镇都知兵马使。
高仙芝任都知兵马使时,每次出军时,身边的随从就有三十多人,而且衣服鲜明。夫蒙灵詧门下的封常清见高仙芝很有才能,也想成为高仙芝的随从,便慷慨激昂向高仙芝投书一封,毛遂自荐。但封常清的形象却非常差,不但身材细瘦,而且还斜眼、脚短跛足。高仙芝见到封常清后,嫌他相貌丑陋,不愿接受。第一天失败后,封常清没有灰心,于第二天再次投书。高仙芝只好推辞道:“吾奏傔已足,何烦复来?”封常清听后大怒,说道:“常清慕公高义,愿事鞭辔,所以无媒而前,何见拒之深乎?公若方圆取人,则士大夫所望;若以貌取人,恐失之子羽矣!”③尽管如此,高仙芝还是没收留他。从此,封常清就早晚不离高府之门,等他出入,如此数十日。高仙芝迫不得已,只好收留了他。
天宝初年④,达奚诸部叛乱,从黑山以北,直到碎叶城(又称素叶城、索虏城,在今俄罗斯伏龙芝市北楚河南岸楚伊斯阔叶附近,一说在今俄罗斯托克马克附近),唐玄宗诏令夫蒙灵詧前去平叛。夫蒙灵詧派高仙芝率2000精骑自副城向北,直至绫岭下邀击叛军。达奚部因行军劳顿,人马皆疲,尽为唐军所杀。封常清在帐中私下写好捷报,捷书中详细地陈述了他们如何“次舍井泉,遇贼形势,克获谋略”⑤。高仙芝想说的,封常清都周到地替他讲了,“仙芝大骇异之”⑥。回军后,夫蒙灵詧设宴犒劳。此时,高仙芝已让封常清“去奴袜带刀见”⑦。判官刘眺、独孤峻等争问:“前者捷书,谁之所作?副大使幕下何得有如此人。”高仙芝答道:“即仙芝傔人封常清也。”⑧众人闻后皆惊,便求仙芝请封常清入座,并互相谈话,谈得很投机,好像旧相识似的。从此,封常清遂知名。此后,经高仙芝不断提拔,先后授镇将、果毅、折冲。
开元年间,唐朝国力空前强盛,史称“开元盛世”。国力的增强,使唐朝的军事实力也随之增强,唐在与吐蕃的战争中也逐渐占有优势。这一时期,唐朝在西域的战略主要是依托安西、北庭(治金满,今新疆吉木萨尔北破城子)所辖各军镇,号令当地土著,或攻或守,不断巩固和扩大控制区域。吐蕃起初是和后东突厥汗国及突骑施等(主要是和后者)联盟,同唐军多次较量,争夺的重点在安西四镇及北庭一带。后来东突厥及突骑施衰落后,唐蕃争夺的重点逐渐转移到葱岭(今帕米尔高原)以南地区。
葱岭上有两个国家,即小勃律(在今克什米尔西北部,都城孽多城,今吉尔吉特)和大勃律(今克什米尔中部一带,都城巴勒提斯坦)。小勃律原为唐属国,是吐蕃通往安西四镇的交通要道。吐蕃赞普把公主嫁给小勃律王苏失利之为妻,小勃律国遂归附于吐蕃,吐蕃进而控制了西北各国,因此“西北二十余国皆臣吐蕃”⑨,中断了对唐朝的朝贡,唐几任安西节度使田仁琬、盖嘉运、夫蒙灵眢数次派兵讨伐,因地势险要,加之吐蕃进行援助,皆无功而反。
天宝六年(747年)三月,唐玄宗下制,以安西副都护、都知兵马使、充四镇节度副使高仙芝为行营节度使,率军万人,征讨小勃律(参见唐击小勃律之战)。由于这次行军要翻越雄伟的葱岭,所以高仙芝在出征前做了充分的准备。
待一切准备就绪,便率部从安西出发,一路西行,经十五日至拨换城(今新疆阿克苏)、又经十余日握瑟德(今新疆巴楚)、再经十余日疏勒(今新疆喀什),随后挥军南下,踏上葱岭,开始了异常艰苦的行军。葱岭即今天的帕米尔(塔吉克语,意为世界屋脊)高原,由天山山脉、昆仑山脉、喀喇昆仑山脉和兴都库什山等交汇而成。高原海拔4000—7700米,拥有许多高峰。帕米尔高原分东、中、西三部分,东帕米尔以中山为主,是帕米尔高原海拔最高的部分,海拔平均6100米或更高,山峰相对高度1100—1800米,山体浑圆,山间谷地宽而平坦,海拔3690—4200米。唐军行军路线不但要经过东帕米尔,而且还要经过海拔7564米青岭(慕士塔格山),其艰难程度可想而知。当时唐军士兵皆有私马相随,后勤方面在规定的时间内都能得到保障;加上唐军选择从平坦宽阔的山间谷地行军,这才使行军的困难降至最低。经过二十余日的艰苦行军,唐军到达了葱岭守捉(今新疆塔什库尔干塔吉克自治县)。然后再次向西,沿兴都库什山北麓西行,又经二十余日到达播密水(今阿富汗瓦汉附近)。唐军继续前行,再经二十余日到达特勒满川(今瓦罕河)。至此,唐军经过百余日的跋山涉水,于同年六月完成了第一阶段的行军。
随后,高仙芝兵分三路,会攻吐蕃的连云堡(今阿富汗东北部喷赤河南源兰加尔):一路由疏勒守捉使赵崇玼统3000骑兵从北谷向吐蕃连云堡;一路由拨换守捉使贾崇瓘统领,自赤佛堂路南下;一路由高仙芝与中使边令诚率主力从护密国南下。三路兵马约定于七月十三日辰时在连云堡下会合。
三路兵按时出发,如期抵达。连云堡南面依山,北临婆勒川,堡中吐蕃守军仅有千人,又在城南15里处因山为栅,有兵八九千人,遥相声援。当唐军进至婆勒川时,河水暴涨,无法渡河。高仙芝认真分析了当前的形势,认为唐军必须尽快渡过婆勒川,否则吐蕃守军一旦发现唐军,势必做好准备,那样一来将大大增加唐军攻占连云堡的困难。于是他命兵士每人自备三天干粮,准备次日清晨渡过。将士都不敢相信高仙芝会下这样的命令,“皆以为狂”。次日清晨,婆勒川河水低缓,唐军迅速渡过了婆勒川,以至“人不湿旗,马不湿鞯,已济而成列矣”。高仙芝见此情景,兴奋不已,对边令诚说:“向吾半渡贼来,吾属败矣,今既济成列,是天以此贼赐我也”。随后高仙芝指挥唐军攻城。吐蕃守军未料到唐军能突然至此,大为惊骇,慌乱中只能依山拒战,滚木擂石如雨而下,不可攀登。高仙芝任命郎将李嗣业为陌刀将,下令说:“不及日中,决须破虏!”⑩李嗣业手持一旗,领陌刀手自险处先登,奋力杀去,自辰时至巳时,大败吐蕃,斩首5000级,俘虏千余人,余皆逃入山谷。唐军缴获战马千余匹,衣资器甲数以万计。
高仙芝准备乘胜追击,但边令诚认为孤军深入敌境过远,惧而不敢进。高仙芝遂让边令诚率老弱士卒3000留守连云堡,亲率大军继续前进。唐军疾行三日,到达坦驹岭(今克什米尔北部德尔果德山口,在今克什米尔西北境巴勒提特之北、兴都库什山米尔峰东)上。坦驹岭长四十里,山口海拔4688米,是兴都库什山著名的险峻山口之一,下岭就是阿弩越城。登临山口,必须沿冰川而上,别无其它蹊径。这里有两条冰川,东面的一条叫雪瓦苏尔冰川,西面的一条叫达科特冰川,冰川的源头就是坦驹岭山口。这两条冰川长度都在10公里以上,而且冰川上冰丘起伏,冰塔林立,冰崖似墙,裂缝如网,稍不注意,就会滑坠深渊,或者掉进冰川裂缝里丧生。高仙芝料想:“阿弩越胡若速迎,即是好心。”又担心士卒惧怕艰险不敢下岭,便选遣20余人装扮成阿弩越城的奉迎使者,从岭下攀援而上,假称阿弩越城人前来迎接,以消除兵士的惧怕心理。到坦驹岭时,士兵果然恐惧不肯下,并对高仙芝说:“大使将我欲何处去?”话未说完,其事先派出的二十人恰巧从岭下赶到,并说:“阿弩越城胡并好心奉迎,娑夷河藤桥已斫讫。”娑夷水(即今克什米尔西北吉尔吉特之北的印度河北岸支流)即古弱水,水上架有一座藤制桥,是小勃律通往吐蕃的唯一之路,断桥则吐蕃不能入援。高仙芝奉迎之语后,假装闻讯欢喜,兵士听后,畏惧心理顿消,唐军得以迅速下岭,向阿弩越城进发。
又过了三天,阿弩越城守军果然派人前来请降。次日,唐军顺利进入城中。入城以后,高仙芝先令将军席元庆、贺娄余润率兵先修桥梁、道路。为了避免强攻造成大的伤亡,高仙芝决定用“假途灭虢”之计智取孽多城。次日,高仙芝令席元庆率1000余众行至小勃律首府孽多城下,对小勃律王说:“不取汝城,亦不斫汝桥,但借汝路过,向大勃律去。”城中有五六个首领,皆死心塌地投靠吐蕃。但高仙芝对此也早有准备,席元庆临行时,高仙芝就曾对他交待:“军到,首领百姓必走入山谷,招呼取以敕命赐彩物等,首领至,齐缚之以待我。”席元庆依计而行,果然俘获小勃律众大臣。小勃律王及吐蕃公主慌忙逃入石窟躲避,使唐军一时无法找到他们的踪迹。高仙芝率唐军主力到达后,首先处死了那五六个首领,然后急令席元庆率军砍断通往吐蕃的藤桥。藤桥离孽多城有六十里,席元庆在日落时终于将藤桥砍断。藤桥刚砍断,吐蕃兵马已至婆夷水东岸,但桥已砍断,这座藤桥长有一箭之地,修复需要一年的时间,吐蕃兵马只得隔水观望,束手无策。接着,高仙芝又派人招谕小勃律王,小勃律王得知吐蕃兵众被隔在水东,援军路绝,生路无望,只得携公主出降,其国遂平。自平定了小勃律国之后,唐军声威大震,“拂菻、大食诸胡七十二国皆震慑降服。”(11)
八月,高仙芝押着小勃律国王和吐蕃公主经赤佛堂路凯旋而归。九月,行至婆勒川连云堡,与边令诚会师,一起返回。九月末,高仙芝回军至播密川,即令刘单起草捷报,并派中使判官王廷芳进京告捷。由于事前未告诉四镇节度使夫蒙灵詧,招致了他的妬嫉与怨恨。当高仙芝一行人回到河西时,夫蒙灵詧不派一人前来迎接慰劳。一见面,就大骂高仙芝:“啖狗肠高丽奴!啖狗屎高丽奴!于阗使谁与汝奏得?”高仙芝忧惧不安,回答说:“中丞。”夫蒙灵詧不依不饶,又问“焉耆镇守使谁边得?”高仙芝答:“中丞。”“安西副都护使谁边得?”高仙芝答:“中丞。”“安西都知兵马使谁边得?”高仙芝答:“中丞。”灵察曰:“此既皆我所奏,安得不待我处分悬奏捷书!据高丽奴此罪,合当斩,但缘新立大功,不欲处置。”又对刘单说:“闻尔能作捷书。”刘单听后大为恐惧,急忙请罪。监军边令诚感到夫蒙灵詧对待此事殊不公正,遂将此事上奏朝廷,称:“仙芝立功而以忧死,后孰为朝廷用者?”(12)
十二月二十八日,玄宗任命高仙芝为鸿胪卿、摄御史中丞,代夫蒙詧为安西四镇节度使,征夫蒙灵詧入朝(唐玄宗将小勃律王赦而不罪,拜为右威卫将军,留京宿卫。诏改小勃律国号为归仁,置归仁军守卫。),夫蒙詧灵十分害怕。高仙芝虽升任安西四镇节度使,但见了夫蒙灵詧仍是“趋走如故”,毫无报复之意,这倒使夫蒙灵詧更加不安。副都护程千里、大将军毕思琛、行官王滔、康怀顺、陈奉忠等,也曾在夫蒙灵詧面前诋毁过高仙芝。高仙芝领节度使后,当面责骂程千里说:“公面似男儿,心如妇人,何也?”又责备毕思琛:“此胡敢来!我城东一千石种子庄被汝将去,忆之乎?”毕思琛忙回答:“此是中丞知思琛辛苦见乞。”最后高仙芝又说:“吾此时惧汝作威福,岂是怜汝与之!我欲不言,恐汝怀忧,言了无事矣。”又把王滔等叫到面前,命拉下去将笞打,然后全部都释放。由于高仙芝把过去彼此之间结下的怨隙一一挑明,并予以宽免,使军将们消除了顾虑,“由是军情不惧”。
高仙芝出任安西四镇节度使后,以封常清为庆王府录事参军,充节度判官,赐紫金鱼袋。不久,又加朝散大夫,专门负责四镇的仓库、屯田、甲仗、支度、营田等事宜。以后高仙芝每次出征,常令封常清为留后使。封常清有才学,办事果断,而且治军极严。封常清任留后使时,高仙芝乳母之子郑德诠已为郎将,乳母也住在内宅,高仙芝对郑德诠更是视如兄弟,家皆委任于他,所以郑德诠在军中的威望很高。封常清每次办回来,诸将都前去拜见,唯独郑德诠傲漫无礼,瞧不起封常清,有一次甚至骑马从常清身旁走过。封常清到了使院,派人把郑德诠召来,每经过一道门,就让人把门关住,见面后,封常清起来对郑德诠说道:“常清起自细微,预中丞兵马使傔,中丞再不纳,郎将岂不知乎?今中丞过听,以常清为留后使,郎将何得无礼,对中使相凌?辈⒑瘸馑溃骸袄山??朐菟酪运嗑荨!?13)于是将郑德诠杖打六十,然后又将郑德诠脸朝下拖出。高仙芝的母亲和乳母闻讯后,在门外号啕大哭,想要救郑德诠,但已来不及了。她们又把情况告诉了高仙芝,高仙芝看后,吃惊地说:“已死矣!”(14)等见到封常清时,高仙芝因封常清执法公正,便不再提起这件事,而封常清也不谢罪。此后,封常清又先后处死了两员有罪的大将,从此“军中莫不股栗”(15)。
天宝八年(749年),高仙芝入朝,加特进,兼左金吾卫大将军同正员,一个儿子也被授五品官。
同年十一月初五,吐火罗(在小勃律以西,今阿富汗北部)叶护失里怛伽罗上表朝廷说:“师王亲附吐蕃,困苦小勃律镇军,阻其粮道。臣思破凶徒,望发安西兵,以来岁正月至小勃律,六月至大勃律。”(16)高仙芝奉命出军。从安西到竭师国(今巴基斯坦奇特拉尔)的距离还要远于小勃律,由于有了第一次远征的经验,高仙芝这次准备更加充分,加上形式对唐军有利,唐军的行军虽然艰苦,但却很顺利。天宝九年(750年)二月,高仙芝击败了竭师国的军队,俘虏了竭师王勃特没。三月十二日,唐廷册立勃特没的哥哥素迦为朅师王。
经过这两次的征战,使唐朝在对吐蕃的战争中取得了全面胜利,唐朝也发展到了其顶峰。同时高仙芝也为自己赢得了极大的声誉,被吐蕃和大食誉为山地之王。高仙芝虽然取得了巨大的成就,但他的一个弱点就是贪婪,这个弱点在他处理民族关系时暴露无疑。
当时大食(阿拉伯帝国)勃兴于西方,并不断向东扩张,安国、火寻、戊地、石国、吐火罗等国屈服,让它们按时交纳沉重的赋税。唐与大食在争夺西域的统治地位时发生了矛盾。由于唐朝在西域实施了有效的对策,有效地遏止了大食向东继续扩张的势头。当时由于唐玄宗有好大喜功,使唐朝边帅经常不顾大局,肆意作成作福。西域的边帅也不例外。这些行为都严重损害了唐朝和西域各国的关系,从而导致边疆出现不稳定的局面。
当时地处中亚的石国(昭武九姓之一,都城拓折城,在今乌孜别克斯坦塔什干)地处丝绸之路,农业发达,居民善于经商,可谓富甲西方。高仙芝垂涎于石国力财富,想要掠为己有。天宝九年,高仙芝诬告石国王“无蕃臣礼”(17),领兵前去讨伐。其实石国与唐朝关系还是不错的,据《册府元龟》卷971记载,自从他继位后,对唐朝一直朝贡不断:天宝二年(743年),遣女婿康国大首领泰染缅献方物;天宝五年(746年)。遣使献骏马十五匹,石国副王伊捺吐屯屈也遣使献方物;天宝六年,遣使献马,天宝八年,还派王太子远恩入关朝觐。对比西域各国,石国国王对唐朝的态度可以说是比较恭顺和真诚的。石国国王那俱车鼻施继位之后,因为对唐朝忠诚,曾被唐玄宗皇帝册封为怀化王,并赐予优待和免罪的证明——铁券。所以当唐军到来后,那俱车鼻施同意高仙芝的约和。高仙芝假意遣使者将那俱车鼻施骗到长安,然后趁乘其不备,出兵掩袭,俘虏石国部众。随后高仙芝纵兵杀掠,甚至连老弱病残都不肯放过。这次行动,高仙芝共获石国“瑟瑟十馀斛,黄金五六橐驼,其馀口马杂货称是,皆入其家。”(18)高仙芝从石国回军的途中,又诬蔑突骑施反叛,攻打了突骑施(19),俘虏了移拨可汗。
与石国一样,突骑施也是当时西域各国中与唐朝关系最亲密的国家之一。石国与突骑施的被攻打,引起当地民众的反抗,唐军因此大肆镇压,被害者除石国的老弱之外,多为在石国贸易的昭武九姓的胡商。于是,高仙芝在向朝廷报功队又多了一项“破九国胡”(20)。
天宝十年(751)正月二十四日,高仙芝入朝,献其所俘获的突骑施可汗、吐蕃酋长、石国王、朅师王。那俱车鼻施行至长安的西北的开远门时,被唐玄宗所杀。移拨可汗也被处斩。玄宗以高仙芝功勋卓著,加授开府仪同三司。大概是不长时间,唐玄宗识破了高仙芝西征的底细,迁就了高仙芝,没有治他的罪,所以高仙芝及其部下虽有灭国之功,但却没得到重赏。不久,唐玄宗任命高仙芝为武威太守,并代安思顺为河西节度使,欲将其调离西域。但由于安思顺讽劝部下“割耳捴面”苦苦相留。此时监察御史裴周南也上奏,故此令未能实行,遂改任右羽林大将军。
由于高仙芝的一系列的错误行为,使唐朝在西域的威望大大下降,“由是西域不服”(21)。石国王子逃到诸胡部落,将高仙芝欺诱贪暴之事遍告诸胡昭武。诸胡部落大怒,就暗中联合大食国欲共攻安西四镇。大食遂以此为借口,实施其扩张计划。
高仙芝获知此事后,收中不安,遂决定先发制人。四月,高仙芝亲率蕃、汉兵3万攻打大食。唐军深入大食国境700余里,到怛罗斯城(又作咀逻私,即今哈萨克共和国东南部江布尔城),与大食军遭遇(参见怛罗斯之战)。唐军虽在兵力上居于劣势,但因高仙芝指挥有方,所以双方激战五日,未见胜负。但在双方相持的重要时刻,唐军中的葛罗禄部众突然叛变,与大食前后夹击唐军,高仙芝大败,乘夜间逃跑。由于道路阻隘,拔汗那部众又在前面挡住去路,人马壅塞道路,幸亏右威卫将军李嗣业奋起大棒,为他杀开一条血路,才得以逃脱。这次战役,士卒死亡略尽,高仙芝仅率数千人逃回。
从军事角度上讲,怛罗斯之战在中国战争史上只是一次普通的作战,但它对当时的世界格局却影响重大。唐军的失败,使唐在中亚的羁縻府州沦丧殆尽。安西都护府属下的精兵死伤惨重,所剩至几,在以后的日子里,对于入侵之敌,仅有招架之功,再无反击之力。唐朝的号令也不再西出伊犁河。不久,安史之乱爆发,唐再也无暇顾及中亚。不仅如此,唐朝还征发西域精兵入关勤王,北庭和安西又抽调了7000人,只剩一些老弱病残守卫西边,以致不得不依附于新兴的回纥国,勉强支撑残局。后来吐藩与葛逻禄相联合,首先攻陷了北庭都护府;不久,吐蕃又独力攻陷了安西,唐朝彻底退出西域。八世纪末,回纪汗国强盛,征服天山以北的葛逻禄,赶走天山以南的吐蕃,势力远达碎叶西域终于归于回纪汗国。怛罗斯一战对大食的影响也很大。大食取得了中亚诸国后,重征赋税,经济实力大为增长,为其继续扩张打下了基础。同时被俘的唐军中有造纸工匠,造纸术也从此传入西方。
怛罗斯之战后,高仙芝被解除了安西四镇节度使之职,入京任右金吾大将军,节度使一职由王正见担任。天宝十一年(752年),王正见死,封常清接任节度使之职。天宝十四年(755年),高仙芝被封为封密云郡公。
天宝年间,在一派歌舞升平声中,唐玄宗开始踌躇满志,不愿过问政事,委政于李林甫、杨国忠等奸佞之人,一味纵情享乐,政治日趋腐化。天宝十四年十一月初九,安禄山以讨杨国忠为名,从范阳(今北京城西南)发兵15万,号称20万,南下反唐,向洛阳、长安(今西安)进攻(参见范阳起兵)。中原已多年没有战事,很多郡县无兵可用,毫无应变准备。地方官吏闻叛军将至,或弃城逃跑,或开门出迎。安军长驱南下,几乎没有遭到什么抵抗,很快占领了黄河以北大部分地区。唐玄宗惊恐,急派入京朝见的安西节度使封常清赶赴洛阳募兵迎战。又仓猝部署对安禄山的全面防御:命郭子仪为朔方节度使,右羽林大将军王承业为太原尹,卫尉卿张介然为河南节度使,程千里为潞州长史;任命荣王李琬为元帅,高仙芝为副元帅,率飞骑、彍骑及朔方、河西、陇右等兵,又出禁中钱召募了关辅新兵,计5万人。十二月一日,高仙芝从长安出发,玄宗亲自在勤政楼为荣王、高仙芝举行宴会,又到望春亭为他们送行,并命边令诚为监军,进屯陕郡(治陕城,今河南三门峡市西)。
十二月,安禄山(안록산)率众从灵昌(今河南滑县东)渡过黄河。由于叛军皆是精锐部队,所到之处无不披靡。封常清虽然善于用兵,但所募之兵皆是市井之徒,无法与叛军急锋,连战连败,叛军很快便攻下洛阳(参见安军攻占东都之战)。封常清率残部迟守陕郡时,陕郡太守窦廷芝已逃往河东,城中吏民皆已逃散。封常清向驻守该地的高仙芝说:“常清连日血战,贼锋不可当,且潼关无兵,若贼豕突入关,则长安危矣。陕不可守,不如引兵先居潼关以拒之。”(22)这在当时力量悬殊的情况下,是明智之举。高仙芝听了封常清的详细汇报,知其所言非虚,于是接受了他的意见,率军退往潼关。急忙打开太原仓,把库中的缯布全部分赐给将士,放火焚烧了仓库,率兵向潼关方面撤退,中途被叛军追及,官军一触即溃,“甲仗资粮委于道,弥数百里”。唐军退到潼关后,高仙芝马上整顿部伍,修完守备,据险抗击,士气也渐渐振作起来。安禄山部将崔乾佑率部赶至,一时不能攻下,只好退居陕郡。安禄山派部将崔乾佑率兵屯于陕郡,临汝、弘农、济阴、濮阳、云中等郡都降于安禄山。当时,唐廷所征的朔方、河西、陇右诸道兵,尚未抵达长安,关中震动。幸好安禄山滞留洛阳准备称帝,没有全力进攻,加之高仙芝、封常清及时退守潼关,作好拒守准备,遏制了安军攻势,关中军民慌恐之情才得以稍安。
玄宗听说封常清兵败,便削其官爵,让他以白衣在高仙芝军中效力,高仙芝命封常清巡监左右厢诸军,以助自己。高仙芝率军东征时,监军边令诚曾向高仙芝建议数事,高仙芝不从,使边令诚怀恨在心。高仙芝退守潼关后,边令诚入朝奏事,向玄宗反映了高仙芝、封常清败退之事,并说:“常清以贼摇众,而仙芝弃陕地数百里,又盗减军士粮赐。”(23)玄宗听了信边令诚的一面之辞后,大怒不已,派遣边令诚赴军中斩高仙芝与封常清。
十八日(即公元756年1月24日),边令诚到了潼关,先把封常清叫来,向他宣示了敕书,将其斩首,暴尸于芦苇之上。高仙芝回到官署后,边令诚带着100名陌刀手,对高仙芝说:“大夫亦有恩命。”高仙芝听后立刻下厅,边令诚遂宣示敕书。高仙芝说:“我退,罪也,死不辞;然以我为减截兵粮及赐物等,则诬我也。”对边令诚说:“上是天,下是地,兵士皆在,足下岂不知乎!”这时被招募的新兵皆排列在外,对高仙芝非常信认。高仙芝大声说:“我于京中召儿郎辈,虽得少许物,装束亦未能足,方与君辈破贼,然后取高官重赏。不谓贼势凭陵,引军至此,亦欲固守潼关故也。我若实有此,君辈即言实;我若实无之,君辈当言枉。”士兵皆呼:“枉。”声音震天。但边令诚不听。高仙芝又看了看死去的封常清,叹息道:“封二,子从微至著,我则引拔子为我判官,俄又代我为节度使,今日又与子同死于此,岂命也夫!”(24)言毕被杀。
高仙芝与封常清是当时名将,他们的被冤杀引起了军心的动摇,也使唐廷丧失了两员具有作战经验的大将,对平定安史之乱造成了严重的不利影响。
点评:高仙芝是唐玄宗时期的著名军事将领。他镇守安西,为维护唐西陲的安全做出了贡献。他退守潼关,暂避敌锋的战略有利于阻止叛军西进长安。但由于宦官的诬陷,唐玄宗的偏听偏信,遂致身死,令人惋惜。另外高仙芝在处理民族关系上也存在严重的问题,唐朝之所以失去在西域的统治,高仙芝也是有很大一部分责任的。
高仙芝生活的时间,正是中国历史上最繁荣的时期,从高仙芝的几次征战来看(尤其是两次帕米尔高原的行军),都显示了高超的指挥艺术,他的军事思想也非常丰富。
高仙芝的军事思想:고선지의 군사사상
1,长途奔袭,分进合击的作战指导。玄宗时期的西域战场,长途奔袭是一大特点,以唐、吐蕃为首的各方都经常采用这一作战指导,而高仙芝更是其中的佼佼者。无论是攻打小勃律、竭师,还是石国、突施、大食,其行军距离少则数百里,多则上千里。不仅如此,高仙芝的行军常常是隐蔽的,这样一来更能出其不意。而当接近目的地后,高仙芝又会采用分进合击的方法攻打敌军。如攻打连云堡时,高仙芝鉴于连云堡地形险要,易守难攻,为了避免顿兵坚城之下,于是兵分三路,对连云堡实施战略包围,从而一战取胜。
2,高超的山地行军艺术。中外战争中,不乏出色的山地行军,如汉尼拔、拿破仑、苏沃洛夫等西方名将都有过类似的壮举。但纵观中外名将,能够在帕米尔高原那种极为恶劣的环境下,统率大军两次完美地完成行军任务的,只有高仙芝一人。这主要得益于高仙芝所做的充分准备:在后勤保障方面,高仙芝做了充分准备。由于高原上补济困难,高仙芝遂让唐军将士携带私马,用来驮运物资,这使使后勤补济在规定的时间内都能得到保障。在行军路线方面,高仙芝也做了精心的选择。首先是决定翻越帕米尔高原,这样一来在战略上可达到出其不意的效果。在进入帕米尔高原后,又挑选平坦宽阔的山间谷地或河道行军,从而将困难降至最低。在行军时间的选择上,高仙芝同样做了周密的安排。选择气温最热的三至十月份行军,这样一来可使唐军避免在严寒中艰苦行军,从而使唐军将士和马匹都的体力不至于消耗过大,从而保证了战斗力。最值得称道的地方是,高仙芝不仅考虑到了出征时所用的时间,还想到了作战时所用的时间和回军时所用的时间,使唐军免受严寒之苦。
有了第一次的经验,高仙芝在第二次行军时更显游刃有余,居然选择在最冷的冬季翻越帕米尔高原,再一次达到出其不意的效果。而且从开元八年十一月初五接到奏书时算起,到九年二月击败竭师国,只用了短短四个月的时间,其达山地行军艺术已到了出神入化的境界。胡秋原先生特地引出英国政府于不久前派遣的斯坦因先生探险故事,斯坦因先生在帕米尔高原勘察了一千年前高仙芝先生行军路线后,评论曰:“数目不少的军队,行经帕米尔和兴都库什,在历史上以此为第一次,高山插天,又缺乏给养,不知道当时如何维持军队的供应?即令现代的参谋本部,亦将束手无策。”又慨叹道:“中国这一位勇敢的将军,行军所经,惊险困难,比起欧洲名将,从汉尼拔,到拿破仑,到苏沃洛夫,他们之越阿尔卑斯山,真不知超过若干倍。”
3,夺取战略要地的思想。从强攻连云堡到不战而取阿弩越城,从计智取孽多城到砍断藤桥,高仙芝先后采取了出其不意、乘胜追击、假途伐虢、断桥阻援的策略,拔其要点,速战速决,将唐军的伤亡降至最低。在谋略的运用上又环环相扣,一气呵成,牢牢掌握着战场的主动权,使敌无机可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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