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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천샤오쉬 유방암으로 5월13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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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루몽의 임대옥역을 맡았던 천샤오쉬,

그녀가 42세의 일기로 13일 돌아가셨다.

陈晓旭去世的时间是5月13日18时57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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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 유방암으로 1년 가까이 투병해왔다. 샤오쉬는 이름이 3개다. 중국인들은 그의 본명 천샤오쉬는 잘 모른다. 대신 샤오쉬의 두번 째 이름 '린메이메이'(林妹妹)는 잘 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열광한다. 린메이메이는 소설 '홍루몽(紅樓夢)'의 여주인공 린다이위(林黛玉)의 애칭이다.

1985년 '홍루몽'의 드라마가 기획중일 때 샤오쉬는 뒷 면에 시 한편이 적힌 자신의 사진 한 장을 들고 연출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을 린다이위 역으로 캐스팅해달라고 요청했다. 연출자는 "린다이위를 연기하는 사람은 반드시 시인이어야 한다"며 그를 전격 기용했다. 그리고 87년 방영된 이 드라마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린메이메이는 대스타로 도약했다.
 
그녀가 출연한 '쟈춘치우(家春秋)'도 린메이메이의 성가 덕분에 호평을 받았다. 샤오쉬는 단 2편의 드라마로 '국민 여배우' 대접을 받았다. 중국 전통 여인의 모습을 잘 묘사했기 때문이다.
 
두 편의 드라마가 가져온 대성공은 그녀를 잠시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방황했다. 89년 그녀는 친구의 권유로 전 재산을 털어 주식을 샀다. 샤오쉬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걸 다 날린 뒤 죽자"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주식은 몇십 배 폭등했다. 큰 부자가 됐고 결혼했다. 96년 남편과 함께 베이징스방(北京世邦) 광고유한공사를 세웠다. 그리고 3년 만에 2억 위안(약 240억 원)의 거금을 모았다.

그리고 불교에 푹 빠졌다. 사업도 전문 경영인에게 넘겼다. 올 2월 남편과 이혼한 뒤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의 한 사찰에서 계(契)를 받고 불자가 됐다. 이 때 그녀는 세번 째 이름 묘진(比丘尼 妙真法师)을 얻는다. 묘진 법사의 남편 역시 전 재산을 가족, 사찰, 자선단체로 3 등분해 증여한 뒤 출가했다.
 
묘진 법사는 출가한 지 채 석 달도 되지 않아 입적했다. 창춘에서 선전으로 옮긴후 병원에서 죽었는지 사찰에서 죽었는지는 조금 불명확한 상태인 것 같다.   
그녀의 뜻에 따라 세워진 자선단체는 약 60억 원의 기금으로 빈민 구제, 병자 치료, 학비 지원 활동을 벌이고 있다.
 
曾在1987年版《红楼梦》中塑造了荧屏经典形象“林黛玉”的女星陈晓旭,
13日因癌症去世,年仅42岁。下面是其一些个人简历。

  姓名:陈晓旭 , 出生年份:1965年

  民族:汉 한족 

  籍贯:辽宁省鞍山市 요녕성 안산시 

  演艺经历 출연작:《红楼梦》(87版) 饰演 林黛玉 홍루몽의 87판 임대옥역,《家春秋 가춘추》 饰演 梅表姐

  小说诗歌文学作品:《我是一朵柳絮》等

 

  陈晓旭,电视连续剧《红楼梦》中林黛玉的饰演者,时为鞍山话剧团演员,后扮演过电视剧《家春秋》中的梅表姐。后来从商,去年出家。

  陈晓旭一共只演了两部戏,即《红楼梦》和《家春秋》。但当年她的名气却大过很多演了一辈子戏的演员,因为她演了林黛玉。陈晓旭曾说,她那时的性格真是很像林黛玉,长得非常瘦弱,爱读书,醉心于芭蕾。

 

  1985年,《红楼梦》剧组开始选演员。18岁的陈晓旭听到这个消息后,拿着一张背面抄着一首诗的自己的照片找到导演,毛遂自荐,要求饰演林黛玉。导演觉得演林黛玉的演员本身应该是个诗人,所以最终让她得到了这个角色。接到试镜的通知,她没有告诉鞍山话剧团的同事和领导,而是请了三天病假,偷偷地跑到北京。在《红楼梦》剧组里一待就是三年,没有任何表演经验的她把林黛玉演绎得凄凄惨惨切切。

 

  《红楼梦》后来成了中国电视史上最风行的电视剧,前后重播了700多次。她和那部戏里的十多位以前默默无闻的男孩女孩一起一夜成名。那时,她只有21岁。“我不觉得我能演林黛玉是因为我长得美,或是演技好,只是我的性格和气质与她很像,”她说。

  《红楼梦》热播后,陈晓旭借助林黛玉一角成了家喻户晓的人物。这为她争取到了电视连续剧《家春秋》的女主角梅表姐的角色。

  “我就拍过这么两部戏。一是我觉得自己在表演上不如别人有天赋;二是由于起点太高,我之后就没有再遇上什么合适的戏了。事实证明,这是我的幸运,要演就该演最好的角色,不是吗?”她曾如是说。

  浮华散尽是落寞。此后,陈晓旭独自漂泊北京——十多年前还没有漂一族”的说法,她成了最早漂在北京的一拨人之一。没有租房中介,没有酒吧和迪厅,不知道往下该怎么走,多次搬家使得她几乎得了房子恐惧症——她害怕拖着行李飘零街头的感觉。

  上世纪80年代末流行出国热,她想去美国,被拒签了。后来在朋友的建议下,她先去德国,想转签去美国。然而,她在德国呆了三个月就回来了。

 

 回国之后的陈晓旭,仍不确定自己该做什么,直到1991年阴差阳错地转入商界。陈晓旭的创业资金是买股票赚来的。那时,中国的股市也是刚刚起步,她拿演出积攒的两三万块钱跟着别人买原始股,没想到股票翻了好几倍,她成了先富起来的人。不跟客户谈广告的陈晓旭,于1996年创立了自己的公司——世邦广告公司,担任董事长。那年,她29岁  29세때 세방광고 동사장。

  

1999年,她偶然在朋友的车上听到净空法师讲解的 우연히 친구 차안에서 정공선사의 무량수경 강의를 듣다《无量寿经무량수경》的录音带。两个月后,她听说净空法师在新加坡讲经,便立即办理了签证,飞了过去,从此踏上了学佛的道路。

  陈晓旭从1991年进入广告界,经过15年的发展,她所领导的北京世邦公司已成为一家年营业额近2亿元的4A广告公司。她被评为“2005~2006年度中国十大最具风采女性广告人”、“中国2005年度经济风云人物”、“2004~2005年度中国30位杰出女性广告人”。

 

  2007年2月份,她和丈夫出家 그녀와 남편 출가。

  2007年5月13日,陈晓旭因癌症去世 천샤오쉬 암으로 별세。

 

cctv.com에서 정리. 산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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