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에서는 "경향신문"이라는 한 언론이 특별히 주목을 받고 있다. 그것은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자살하기 전에 유독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만을 남기고 자살하였기 때문이다. 진실을 지켜주고 인터뷰 내용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해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경향신문은 어떤 신문이고 역사는 어떨까?
어제 한국천주교회사 4권 4장 강좌에서 나왔던 바로 그 경향신문 이야기입니다. 정리한 자료가 있어 올리니 참고 하십시오. 뉴스와 관련이 있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이 실렸던 제 블로그로 찾아 왔네요.
원문 참고 : http://jackleecom.blog.me/220330258288
경향신문의 창간
1906년 10월 19일 천주교에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서울종현본당(현 명동성당)에서 발간한 순한글판 주간신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의 일본의 강제 체결 이후 국권회복을 부르짖으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천주교회에서도 이에 부응하여 신문을 창간한 것이다.
발행인 겸 주필은 프랑스인 신부 드망즈-안세화(安世華, Florian Demange)였다. 외국인을 발행인으로 한 것은 외국인의 치외법권적 지위를 이용하여 통감부(統監府)의 언론탄압을 피하고자 한 방편이었다.『경향신문』이라는 제호의 '경향'이라는 말은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 즉 "도시(교황청)와 전 세계에게"라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표어에서 비롯되었다.
창간사를 보면,
“경향신문을 낼 까닭이 네가지 있으니 그 하나는 대한과 다른 나라의 소문을 드러냄이니…모든 지방의 소식을 각 지방과 먼 산골까지도 전해 줄 것이니…무익하고 거짓 소문이 나는 때면 우리 신문이 특별히 옳고 그름을 밝힐 터이오…나라와 백성 사이에 상관되는 일에 무엇이 믿을 것인지 일러주고 믿을 까닭까지 밝혀주어 대한 백성의 유익을 도모하겠노라. 그 셋은 꼭 필요하고 중요한 지식을 나타냄이니,어느 나라 백성이든지 좋은 지식을 알면 유명해지니..그 넷은 유식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과 남녀노소,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다 알아 듣기 쉬운 신문을 드러내고자 함이니...후략.”
서울백성뿐만 아니라 시골백성에게도 배포하여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의도 아래 명명된 것이라 하고, 공정한 보도와 지식의 보급, 특별히 쉬운 한글로 만들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신문을 만든 것이다.
제1면에 주로 일일특보(日日特報)라 하여 국내의 주요 기사 및 시사문제에 관한 논설과 국내외 소식, 문예작품, 계몽적인 기획물들이 실렸고, 부록인 보감은 시사성을 띤 신문기사와는 다른 성격의 교리적인 논설, 한국천주교교회사, 중요한 법률해설 등으로 꾸며졌다.
기사나 논설은 독자들로부터 비교적 좋은 평을 받았으며, 논설은 당시 대표적인 일간신문이었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전재되기까지 하였다.
취재와 편집에 절대적인 기여를 한 사람은 1882년 말레이시아(Malaysia) 페낭(Penang)의 신학교에 유학하였던 한국인 신부 김원영(金元永)으로서, "경향신문"이 창간되자 한국어에 서툰 드망즈 신부를 도와 신문의 편집과 실무를 맡았다.
지방소식은 주로 전국 각처에서 활동하는 신부들이 제공하였으며, 보급에 있어서도 교회당국이 지원하여 독자를 확보하였다. 1907년도 기록에 의하면 4,200명의 정기구독자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0년 4월 22일자 제184호가 ‘짐승같은 헌병과 보조원”이 문제가 되어「신문지법」에 의하여 치안방해라 하여 발매금지 및 압수를 당하기도 하였다.
1910년 국권을 탈취당하자 폐간의 위협을 받게 되었으며, 그 해 12월 30일 종간호(제220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제221호부터는 "경향잡지(京鄕雜誌)"라 개제하여 1911년 1월 5일자부터 월 2회 발간의 잡지로 변경하여 발간하였다. 이 당시 "보감"이라는 별책 부록이 발간되었는데 이후 경향잡지에 통합 되었다. 경향이라는 이름을 계승한 것은 신문의 재발간을 염두에 둔 드망즈 신부와 뮈텔주교의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뮈텔 주교는 잠시 경향신문이 빛을 볼 수 없지만 실망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경향이라는 이름을 보존할 것을 지시했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서 경향의 이름은 잡지에서나마 연결이 되었고 신문은 1946년에 가서야 해방과 함께 경향신문으로 부활할 수 있었다.
경향신문의 재발간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조선정판사 사옥과 그 시설 일체를 미군정이 압수하여 가톨릭에 넘겨줌으로써 1946년 10월 경성천주교 재단에서 복간했다. 초기에는 가톨릭 계열 언론사로 이승만의 단정 노선에도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김구의 남북협상론은 비현실이라 주장했다. 반면, 미소공위와 좌우합작에 많은 기대를 걸기도 했다. 또한 미군정에 협조적이면서도 옳지 않는 일에는 날카롭게 비판도 하고 책임을 물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친 민국당, 친민주당적 노선을 견지했다.
제1공화국 기간 내내 국무총리와 부통령을 지낸 장면(張勉)을 정치적으로 지지하였다. 이때문에 1958년 이승만과 자유당으로부터 정간처분을 당하기도 했다.(경향신문 필화 사건 참조.) 1959년 이후 자유당 독재체제가 굳어지자 반독재 노선을 분명히 했으며, 장면 부통령 피습사건 이후 비판의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장면의 인척인 한창우가 사주로 취임하였고, 경향신문은 제2공화국 기간 내내 장면을 비판적으로 지지하였다.
경향신문의 굴곡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민간에게 불하되면서 종교 성향을 띠지 않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비판적 논조가 거슬린다며, 경향신문 주요 인사 교체, 주가와 판권매각으로 정수장학회와 여러 대기업의 소유가 되었으며, 당시 언론통폐합으로 합쳐진 MBC와 함께 친군부 성향 언론사로 변질되었다.
문화방송 계열사이던 1980년만 해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유럽의 좌경화로 표현하는 등 친군부,반공주의적 논조를 보였다. 이러한 경향신문의 반(反) 민주적이고 친독재정권 성향의 논조 때문에 1987년 6월 항쟁 당시 경향신문에 대해 분노한 시위 군중,시민들이 지방 배송을 위해 서울역 앞에 쌓여 있던 경향신문을 대량으로 소각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경향신문의 재부활
1990년에 한화그룹에 매각되었다가 1998년에 사원주주회사로 독립한 이후부터는 진보와 개혁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여러 사설, 칼럼, 기사 등에서 진보 성향을 띄는 독립신문이 되었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천주교회사 4 한국교회사연구소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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