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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풍요롭게/닐로의 천주교 이야기

[스크랩] 토요일 자유성지순례-바오양부두에서 총밍다오 신개하바오로성당 대공소예수성심당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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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답사를 미리 가서 배편을 알아 본 바로는 오송항에서 총밍다오 신허전으로 가는 배가 7시50분과 12시 15분 두편밖에 없었다. 그래서 바오양부두로 가서 확인해 보니 여기는 30분 간격으로 총밍다오 남문부두로 가는 배가 있었다. 남문부두에서도 신허전의 성당 근처에 바로 가는 버스가 있어 편리하였다. 그래서 이 노선을 잡기로 하고 준비한 것이다. 


토요일 오전부터 비가 내렸다. 우산을 챙겨 들고 세기공원역에서 예 신부, 이 안토니오 가족과 함께 모두 5사람이 2호선전철로 출발. 4호선 3호선 갈아타고 송빈루역에서 내려 버스편으로 다시 바오양부두宝杨码头에 도착. 12시 출발 배표를 사서 바침내 승선했다. 



배는 1층과 2층으로 구분이 되는데 2층은 귀빈실로 10위안을 더내면 된다. 2층에서 간단히 싸 온 먹거리로 점심을 먹었다. 안개가 잔뜩 낀 넒은 장강을 보면서 40여분을 지나 총밍다오 남문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남바오전선버스편으로 리신정류장立新站에 내렸다. 바로 눈앞에 성당 건물이 나타났다.(미리 답사를 해서 나는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성당에 도착하니 입구 문이 열려 있다. 미리 연락을 취해 성당에서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어 문을 열어 둔 것 같다. 안으로 들어 가니 신부님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장용정张永正 신부로 산시성 출신이다. 자료를 보니 총밍다오 신부들이 산시山西(산서)성과 산시陕西(섬서)성 출신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다. 


신개하바오로 성당은 총밍다오 최초의 성당


신개하바오로성당(新开河保禄天主堂신카이허바오로성당)은 신허진 민주가 180호에 위치하고 있고 1636년 이탈리아 예수회 소속 전교사 브란차티 신부(Frarcuis Brancati,潘国光)와 쉬치위안徐启元이 신허전 서가집에 일종의 공소인 후이코우会口을 창립했다. 브란차티 신부는 상해 예원 옆의 경일당敬一堂을 세운 신부이기도 하다. 그러다 천주교 금교禁教시기 잠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개항조치가 내려진 이후 1865년에 신개하성당新开河天主堂이 세워지고 1869년에 확장하였다. 1902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팡지朱方济에 의해 중건되었다. 1981년에 다시 중건되었다가 2016년 현재 내부 수리중에 있다. 현재 주임 사제总铎는 산시성山西省 출신의 장용정张永正 신부가 맡고 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마침 성가대에서 바오로축일 기념 성가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 성당의 주보 성인이 바오로다. 그래서 연습삼아 우리에게 성가 2곡을 불러 주었고 우리 본당 예신부님이 중국 신부와 교우들에게 강복을 내려 주었고 중국 신부가 예 신부와 우리에게 또 강복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장신부는 우리에게 신개하바오로성당에 대해서도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성당 앞의 신카이허루도로가예전에는 수로河였었고 길 건너편까지 성당 땅이었단다. 건물은 사합건물이었는데 동편의 일부 건물이 철거 되었단다. 신도수는 등록은 몇천인데 실제 미사 나오는 숫자는 100여명이고 성가대 연습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제일 젊은 사람들이란다.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일하러 나가고 없단다. 


대공소예수성심성당은 공소를 모아 만들어진 성당


신개하바오로성당을 잘 보고 우리는 다시 버스를 카고 부쩐堡镇의 시장 버스 정류장(小菜场샤오차이창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다음 목적지인 대공소예수성심당(大公所耶稣圣心堂다공쑤오예수성신탕)을 가기 위해 강앤쩐港沿镇에 내렸다. 저 멀리 하늘로 높이 뻗은 지붕위의 십자가가 보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 왔다. 다리를 건너면서 이곳까지 배가 들어오는 상상을 한 번 해 보았다. 1842년에 잠시 들렀을 것으로 언급된 숭명도(총밍다오)와 1845년 8월 31일 상해항을 떠나 오송항을 거쳐 서해 바다로 항해하기 위해 출발한 김대건 신부 일행의 라파엘호가 궂은 날씨로인해 잠시 대피해 있었던 곳이 총밍다오이며 특히 대공소예수성심성당은 총밍다오의 중심 본당이기에 이를 염두에 두고 찾아 가보는 것이다.  







대공소예수성심성당은 1677년 벨기에 출신 예수회 소속 전교사 쿠플레(Philippe Couplet 柏应里,1623-1693)신부가 , , , 씨의 공소(会口)들을 모아 대공소라를 건립하였다. 총밍현강앤진崇明縣港沿骏马村280号에 위치한다1843년 강남교구의 베시(Bishop Lodovico Maria (dei Conti) Besi,18051871)주교가 신자 허씨등이 자금을 모아 주어 이 곳에 두번째 성당을 지었다.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 같다. 1845년에는 프랑스 출신 예수회소속 거피다葛必达 전교사등이 와서 대공소 교무를 보았다. 1916년 지역 주임사제인 미국적 예수회소속 묘양산苗仰山 신부가 원래 성당이 있던 자리에 중국과 서양의 특징을 융합한 7칸 18량의 대성당을 지었다. 성당 팡에는 27미터의 종루를 세웠다. 문화혁명시기에 상당 부분 건물이 훼손 되엇다. 1960년에는 총밍다오지역이 강소성교구에서 상해교구로 관할 지역이 변경되었다. 


1981년 7월 교구는 기존의 성당을 토대로 해서 성당을 재건 했고 , 성당 앞에 18m  높이의 종탑을 새로 지었다. 1983년 성탄절에 복당봉헌전례 행사를 치렀고 2003년 4월에 총밍현에서 이 건물에 대해 현급 보존문물로 지정이 되었다. 2006년에 교우들과 상해교구가 공동 출자하여 성당을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했고 종탑도 40미터 높이로 높였다. 


현재주임신부는 황정핑黄政平신부고 보좌신부로 자샤오위贾少宇신부가 맏고 있고 수녀 2명이 있다. 


 

 노 수녀님들. 왼쪽 수녀님이 98세, 오른쪽 수녀님이 92세라고 한다. 


자신부가 대공소 관련 자료 정리본을 보여 주어 대공소 역사 기록을 볼 수 있었다. 우선 필요한 부분만 사진으로찍어 왔다. 나중 필요하면 복사해 줄 수 있다고 했다.   


1845년 8월31일 저녁무렵 상해를 출발하여 베시 주교댁 앞에서 닻을 내리고 있다가 관헌의 배를 따돌리고 다음날 운하 어귀에 이르렀습니다. 운하 어귀에서 산동까지 라파엘호를 끌고 가기로 한 중국배 옆에 정박했습니다. 여러차레 출항을 시도했으나 맞바람이라 원양으로 나가기 힘들어 포구로 세번이나 돌아 왔습니다.

숭명도 근처에는 안전한 정박지가 있는데, 북쪽으로 가야하는 100척의 배가 닻을 내리고 순풍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리로 대피해 들어 갔습니다. 중국 배 선장이 우리더러 자기 배에서 성모성월축일(9월8일)을 지내라고 청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훌륭한 페브르신부와 좀 더 함께 있어야 했기 때문에 기꺼이 수락하였습니다. ..미사 네 대가 봉헌되고 신자들은 모두 성체를 모셨습니다. 저녁에는 화전이 불꽃다발이 되어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이것이 중국에 대한 우리의 하직이고 출발 신호였습니다.

우리는 닻을 올리고 우리 배를 굵은 밧줄로 중국배에 붙잡아 매고 조선을 향해 우리의 항해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페레올 주교의 서한 1845년10월29일에서)


대공소 자贾신부와 당시의 내용을 이야기 하면서 숭명도 어디쯤에 배가 정박했을지를 추정해 보았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추정지로 잡은 곳은 부쩐 부두(堡镇码头)쪽이 아닐까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대공소까지 다녀갔는지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나 수로는 당시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노수녀님께도 그 이야기를 들려 주고 이 이야기를 아는지 물어 보았으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아쉽지만 뿌쩐 부두에서 잠시 정박했었을 것이라는 좋은 추정의 내용은 가져 가는 셈입니다.


토요일 상해화동지역 자유 순례  3차는 대공소까지다. 대공소 신부들은 다들 공소일로 바빠 다시 일보러 가고 우리는 이제 상하이로 돌아오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강앤진에서 천자진까지 가는 버스를 탔고 다행히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천자진에서 상하이 커지관으로 오는 선총2호선 버스가 있어오래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타고 상하이로 돌아 왔다. 그리고는 주원에 와서 따끈한 국물로 저녁을 먹고 오늘 하루를 복기 하면서 힘든 하루 일정을 마쳤다. 


2016.6.25 토요일 자유순례3차를 마치고 

출처 : 상해 포동한인성당
글쓴이 : 이진귀 닐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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