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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풍요롭게/닐로의 천주교 이야기

[스크랩] [남경]174년 전 난징에서 유명한 관광지였던 대보은사 유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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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절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이 대보은사(大报恩寺)는 174년 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당시 난징조약이 끝나고 일행과 같이 난징 시내를 구경하면서 방문 하게 되었던 절터입니다. 김 신부님의 발자취가 서리어 있는 곳입니다. 


난징대학살기념관을 아침 일찍 방문해서 보고 난 직후라 마음이 매우 무거운 상황이었습니다. 30만이라는 난징 시민을 집단 학살했던 일본의 잔혹성에 놀라웠지만 그 이후 아직도 집단 학살에 대해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는 일본이라고 합니다. 


대보은사유적지겸 박물관은 오는 도중에 성벽과 높은 탑이 보이기에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절에서 당시 가장 유명했던 것이 바로 이 탑이었던 모양입니다. 유리탑이라고 불리웠고 한편으론 서양에는 도자기탑으로 알려지기도 한 유명한 탑으로 높이가 78미터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주소지는 위화루1호(中华门外雨花路1号)로 네이환난시엔(内环南线내환남선)을 타고 오다 위화루에서 좌회전 받아 입구를 찾아 오면 됩니다. 입장료는 80위안으로 비싼편입니다. 


이 절은 동오(东吴)때 처음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절이름은 건초사(建初寺). 

명나라 영락제때 재창건되어 대보은사라  이름 붙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평천국난때 완전 파괴되어 소실되었답니다. 지금은 그 당시의 모습을 복원하여 유적지로 만든 것이라고 하고 그 비용을 불교와는 관계도 없는 중국의 한 사업가(완다그룹 왕회장)가 10억위안(약 1700억원)을 기부하여 복원하여 2015년 12월에 재개장하였다고 합니다.  


▲ 서양에 알려진 대보은사 그림


1842년 김대건 신부가 당시 이 절을 보고 적은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김대건 신학생의 번째 편지
발신일 : 1842 12 9
발신지 : 요동 백가점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전략

신부님도 아시겠지만 남경시에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탑이 있는데, 장교들이 그것을 구경하러 가기에 저도 그들을 따라가서 탑과 시가 전체를 구경하였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남경은 인구가 백만 명이라고 하는데 아주 평탄하며 개의 운하로 구분되어 있고, 도시는 크고 넓지만 아름답지는 못합니다. 도시 북쪽에 산이 있는데 그곳에 영국군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보인사(寶印寺)라고 하는 가운데 높이가 2 척이나 되는 탑이 세워져 있는데 여러 가지 색깔의 돌과 도금한 돌로 되어 있고 위에는 여러 신의 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탑의 외부는 여러 가지 색깔의 기와로 입혀져 있는데 모양은 팔각형이고 50개의 작은 종들과 개의 구슬이 있고, 밖에도 눈에 띄는 등이 12개나 달려 있습니다. 등들 덕분에 위로는 33() 비추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비추어 사람들의 선행과 악행을 분간한다고 중국인들은 믿고 있습니다.
탑의 꼭대기에는 중량이 9 근이나 되는 질그릇 단지 개와 천반(天盤), 하늘의 접시라고 하는 4 50근이나 되는 접시가 있습니다. 탑이 광채로 세상을 비춘다고 믿고들 있습니다. 탑의 기단에는 여러 겹의 둥근 원이 있는데 무게가 3 6 근에 달한다고 합니다.
밖에도 탑을 다섯 가지 보석으로 꾸몄는데 그것들은 각각 밤을 비추는 야명주(夜明珠), 비를 쫓는 비수주(備水珠), 화재를 막는 비화주(備火珠), 폭풍우를 피하는 비풍주(備風珠), 먼지로부터 탑을 보호해주는 비진주(備塵珠) 등으로 불립니다.
밖에 중국인들의 거룩한 (經典) 3권이 보관되어 있는데 비교(秘敎) 책인장경(藏經), 기도서인아미타불경(阿彌陀佛經), 부처님 경배 권유서인제인불경(濟人佛經)이라는 것입니다.
절과 탑의 기초는 대략 2 전에 세워졌답니다. 처음에는 탑의 이름을 고이왕 이라고 불렀다가 체우라는 황제가 즉위 3년에 퇴락한 절을 보수하여 견초사, 첫째 절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순카오라는 사람이 절을 쇠붙이로 파괴한 것을 진왕조의 키엔운 황제가 재건하여 창건사(創建寺)라고 불렀다 합니다.
그러나 20 왕조인 () 이르러서 황재로 전소된 있다가 21 왕조인 () 영락 황제 예전의 상태로 제건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에는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까지 22개의 왕조가 있었습니다.
절을 재건하는 19년이 걸렸는데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탑을 세우는 데만 거의 4백만 원의 비용이 들었다 합니다. 그후 카친 황제 때에 탑의 3분의 1 벼락으로 무너졌었는데 근래에 수리하였다고 합니다.
관광을 마치고 오송구로 돌아오는 도중에 우리가 고대하던 파보리트호(프랑스 군함) 만났습니다. 배로부터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그의 동행인 토마스(최양업) 요한이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과 괴로움을 한꺼번에 느꼈습니다. 우리가 모두 모였으니까 즐겁기는 하나 우리의 사정이 더욱 곤란한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또한 서글펐습니다.
후략


보인사는 보은사. 견초사는 건초사로 추정됩니다. 


2016.8.27 대보은사유적지를 방문하고 




 

출처 : 상해 포동한인성당
글쓴이 : 이진귀 닐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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