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미술관 옥상에서 서귀포를 둘러 불때 저 멀리 한 눈에 성당이 보였다. 그러니까 이중섭 거리와 서귀포 성당은 가까이 있다. 이중섭 거리를 보고 나서 곧 바로 성당으로 갔다.
서귀포 성당을 먼저 돌아 보고 서귀포 성당의 역사를 살펴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2013년 가톨릭미술공모전 참가 작품(성당 입구에 걸려 있다)
서귀포시 태평로 398에 위치하고 있고 주보성인은 성 파트리치오, 공소로 가나안 공소가 있다. 주임 신부는 부영호 대건안드레아 신부(2017.2.3 부임)며, 주일 교중미사는 10:30이다.
서귀포성당의 역사
서귀포 역사는 제주도에 첫 정식 공동체가 성립한 시기와 맞물려 있다.
서귀포 본당의 설립
서귀포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것은 1898년 4월경 육지를 왕래하다가 세례를 받고 돌아온 양용항 베드로와 이 라우렌시오가 양 베드로의 고향인 대정군 색달리[현 서귀포시 색달동]를 비롯하여 제주 전 지역에 신앙을 전하면서였다. 그 무렵 제8대 조선교구장 민 아우구스티노(뮈텔) 주교는 제주 지역에 복음의 터전을 마련하려는 목적에서 1899년 4월 신부 2명을 제주도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파견된 신부가 김원영 신부와 페이네(배 카를로) 신부였다. 제주중앙성당을 세우고 난 후 페이네(배 카를로) 신부가 1900년5월 전라도로 전임되고 후임 라크로(구 마르첼리노,구마슬)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해 왔다. 라크로 신부 부임후 보좌로 있던 김원영 신부는 라크로 신부와 협의한 끝에 1900년6월 12일 제주를 떠나 한논[서귀포시 호근동 194번지]에 정착하였으니, 이것이 곧 서귀포 본당[한논 본당]의 설립이었다. *한논=많은 논,대답, 하논,마르형 분화구 속의 바닥 논
여기서 잠시 김원형 신부에 대해 살펴 보기로 한다.
세례명 아우구스티노(Augustino). 충청남도 공주 출생. 1882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말레이반도의 페낭신학교에 유학하였으나 1891년부터 페낭 유학생을 불러들이게 되자, 그 이듬해에 귀국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편입해서 남은 학업을 마쳤다.1899년 종현성당(지금의 명동성당)에서 주교 뮈텔(Mutel, G. C. M., 민덕효)의 집전으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 해 5월 신부 페이네(또는 페네)와 함께 제주도에 첫 선교사로 파견되어, 서귀포 한논에 본당을 창설, 제주도 전교의 기틀을 잡았다.이곳에서 전교 도중 제주민란으로 인해 다수의 교도가 희생된 교난을 당하였으나, 그 뒤 황해도 봉산, 함경남도 안변등 여러 곳에서 전교에 힘썼고, 1904년에는 경기도 행주천주교회의 초대본당신부로 부임하여 성당을 건립하였다.1914년부터는 수원 갓등이 성당(지금의 왕림성당)의 주임신부를 겸임하면서, 교회에서 운영하던 삼덕학교를 4년제의 신명의숙으로 개편하여 교육 사업을 발전시켜 나갔다. 1917년 갓등이 본당을 전담하게 되자, 1927년 성 바오로회의 수녀들을 초빙, 이 학교의 교육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경향신문의 부록으로 발간 되던 보감(1906-1910)의 실무자로 드망즈 신부의 편집을 도우기도 했다. 1933년 황해도 신계로 전임되어 3년간 사목활동에 전력하다가, 1936년 봄 피정을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가 몸이 쇠약해져 임지에 돌아가지 못하고 주교관에서 요양 중 10월에 선종했다. 유해는 용산 성직자묘지에 안치되었다.
홍로 본당 이전과 서귀포 성당
1901년 신축교안으로 한논 본당의 신자 수는 교안 직전까지 137명을 기록할 정도로 전교가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제3대 엄 에밀리오(타케) 신부 부임 직후에는 35명만을 기록하였다. 엄 에밀리오 신부는 1902년 7월경에 본당을 홍로[현 서귀포시]로 옮겨 ‘홍로 본당’으로 바꾼 후 본당 정착을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전교에 노력하였고, 식물을 채집하여 유럽의 학계에 보고하기도 하였다.
이후 홍로본당은 1937년 8월 15일에 서귀면 서귀리[현 서귀포시 송산동]로 다시 이전되었다.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라이언 토마스 신부가 10대 주임신부로 부임하면서 새 전기를 맞이했다. 그는 서귀리로 신앙 터를 옮겨 목조 함석집과 초가집을 성당과 사제관으로 개조해 1937년 ‘서귀포성당’ 시대를 열었다.
아일랜드 출신인 라이언 신부(1907~1971)는 “700년의 투쟁을 통해 아일랜드가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했다”며 신자들에게 독립심과 저항정신을 고취시켰다가 일제에 의해 2년간 옥고를 치렀다.1999년 건국훈장을 전수받은 라이언 신부는 애국지사 반열에 올랐다.
일제 말기와 8·15 광복, 6·25 전쟁 등으로 본당은 다시 한번 큰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일제 총독부에 의해 제주도가 전쟁의 전진 기지로 변모되었고, 성당 안에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신자들은 성당에 나갈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잠시 동안 옛 홍로 성당에서 성신대학의 대신학생들을 위한 피난학교가 운영되었다.
1952년 4월에는 제11대 주임 원 요한 신부가 부임하여 ‘해성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그리고 해성 유치원 보모인 고 데레사·김 다리아·송 아네스 등은 서귀포에 피난해 있던 적십자병원의 신자 의사, 간호사들과 함께 성가대를 조직하였다.
공소들이 차츰 본당으로 승격하면서 1958년에 모슬포 본당, 1970년에 서귀 복자 본당, 1973년에 성산포 본당, 1988년에 효돈 본당을 분리하였다.
제주교구 신설과 새 성전 건립
1971년 7월 14일 제주 지역은 광주 대교구에서 분리되어 제주 지목구로 설정 되었다. 허승조 보좌 신부는 1972년 8월에 ‘남부 지구 청년 연합회’를 조직하여 각 본당 청년회 활성화에 힘쓰며 젠 성가를 보급하였다. 제주 지목구는 그 후 1977년 3월 21일 교구로 승격되었다. 1995년에는 본당 주보 『서귀포』를 창간하였고, 2000년 3월 4일 새 성전을 봉헌하였다. 그리고 2013년 4월 20일 서귀포성당을 출발지로 옛 성당터인 하논성당을 돌아 오는 순례길(환희의길,10.6킬로미터)을 개장하였다.
서귀포 성당의 엄(타케) 에밀리오 신부는 왕벚나무 자생지가 제주임을 세계에 알렸다.
제주의 식물이 서양에 처음 알려진 것은 제주 선교역사와 때를 같이한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타케(Emile Joseph Taquet, 1873∼1952) 신부다. 그는 엄택기(嚴宅基)라는 한국명도 갖고 있어 '엄신부' '엄 에밀리오 신부'로 불렸다.
타케는 1873년 10월 30일 벨기에 국경 가까운 프랑스 루르드 주에서 태어나 1892년 9월 23일부터 1897년 9월 27일까지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수학·졸업과 동시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신부로서 첫 임지인 한국으로 부임하기 위해 파리를 출발한 것은 신부로 임명된 당시인 24세 때로서 1897년 10월 28일이다.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는 1898년 1월 5일에 도착했다. 그해 4월 부산 초량(현 범일) 본당의 3대 주임을 역임했으며 밀양, 김해, 진주, 거제도, 마산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타케가 제주에 부임한 것은 광무5년(1901) 제주 전역에 걸쳐 천주교도와 도민이 무력 충돌한 '이재수란'(신축교안)이 발생한 이듬해인 1902년 4월 20일. 타케는 1902년 '한논'(서귀포시 호근동 하논)본당의 3대 주임으로 부임한 후 그해 6∼7월 사이에 본당을 홍로(烘爐)로 옮긴다. 홍로는 지금의 서귀포시 서홍동 일대다. 그는 1915년까지 13년간 대부분의 기간을 이 곳(복자수도원 면형의 집)에서 지내며 선교 활동과 함께 왕성하게 식물 채집에 나선다. 타케가 머물던 홍로 본당이 선교 역사 뿐만 아니라 제주 근대식물 연구에 매우 중요한 족적을 남긴 공간으로 회자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쉽게도 채집자료 상당수는 4·3때 불쏘시개로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타케는 1915년까지 제주에 머무는 동안 집중적으로 제주도의 식물을 채집한다. 그가 채집한 표본은 유럽 각국의 대학이나 박물관에 매각되거나 기증되면서 유럽의 학자들에 의해 발표되었다. 세계 식물사에 제주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는 표본을 보내 얻은 수익금으로 포교사업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비박사 석주명은 한 기고문에서 "타케가 선교사이기도 했지만 濟州島 식물채집조사가로서 오히려 유명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타케의 서귀포 재임중 행적은 당시 그가 뮈텔주교에게 띄운 여러 통의 서한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뮈텔주교는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다. 이 서한은 한국교회사연구소가 1965년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타케가 작성한 것으로는 모두 18통이 전해지고 있다. 타케의 서한은 당시 제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신부들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타케의 서한은 '한논'에서 작성된 것이 1통, 제주에서 작성된 것이 6통이고 나머지는 모두 홍로에서 작성된 것이다. 특히 타케의 서한에는 식물채집과 그 표본을 서구에 보내는 과정, 식물을 팔아 선교비용으로 충당하는 내용 등 제주도의 식물이 서양으로 진출하는 역사가 생생히 기록돼 있어 관심을 끈다.
식물학계에서는 타케 신부가 1902년부터 1915년까지 제주도 포교에 종사한 때가 한국식물분류학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때라고 평가한다. 제주도 특산식물인 왕벚나무도 타케가 1908년 4월 14일 관음사 일대에서 채집한 표본(표본번호 4638번)을 기준으로 독일의 케네(Koehne) 박사가 왕벚나무로 감정함으로써 이 나무의 자생지가 제주도라는 설이 나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표본은 자생 왕벚나무의 표본으로서는 최초이다.
타케는 제주 체류기간 하루에 여덟 시간씩 식물조사에 몰두했다고 한다. 때로는 그 이상 식물채집과 표본 만들기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식물채집에 푹 빠져 심심할 사이가 없으며 오히려 심신이 편안하다"고 뮈텔주교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그가 채집한 수많은 종류의 식물표본은 유럽 등으로 보내어져 전공 분야에 따라 각 전문가들의 흥미로운 연구자료가 된다. 이 표본을 연구한 수많은 논문이 프랑스는 물론 영국, 독일, 덴마크, 스위스 심지어는 일본에서까지 발표되었다.
전북대 선병윤 교수는 한국식물분류 역사를 정리한 저서에서 "타케가 보내 신종으로 명명된 식물들 중에는 섬잔대, 한라부추, 왕밀사초, 두메담배풀, 섬잔고사리, 반들고사리, 갯취, 좀갈매나무, 제주가시나무, 사슨딸기, 해변취, 한라꿩의다리, 뽕잎피나무 등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가 채집한 것들 중에는 제주 특산식물이 많이 포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섬잔대(Adenophora taquetii Leveille)', '뽕잎피나무(Tilia taquetii Schneider)'처럼 그를 기념해서 붙여진 학명도 13종이나 된다.
타케의 제주도 식물 채집은 1907년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은 제주에 오기 전인 1911년에 아오모리의 포리 신부 집에 35일간 머물면서 이 채집품을 감정했는데, 그 양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카이는 포리 뿐만 아니라 1913년 제주에 처음 오자마자 타케를 찾아 채집품을 감정했다. 나카이는 1914년 제주도 식물상을 처음 집대성하는 등 제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식물연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일본으로부터 온주밀감을 들여와 서귀포지역이 감귤주산지로 성장한 시초 역시 타케 신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가 100여년 전인 1911년의 일이다. 근대적 의미의 제주감귤 재배의 시작이다. 그가 도입한 온주밀감은 역시 프랑스 출신 성직자로 일본 아오모리에 주재하던 '포리'(Faurie R. P, 1847∼1915) 신부로부터 받은 묘목이다. 타케는 모두 10여그루의 온주밀감을 심었으나 지금은 옛 서홍성당 자리에 1그루만 남아 있다.
타케는 1915년 6월 제주에서 목포본당으로 전임되어 활동하다가 1922년부터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전임되었고 이곳에서 1940년에 은퇴한 뒤 1952년 1월 27일 영면했다. 1964년 12월 교구청의 화재로 보관중이던 식물표본과 식물학분류 자료들이 소실됐다. 그의 묘는 현재 대구시 남구 남산동 천주교구내 성직자 묘소에 있다. 한라일보,2016.3.1
제주교구 순례길
제주교구가 제주를 찾는 신자들을 위해 조성한 순례길이다. 모두 6개 코스로, 총 길이는 68㎞다. 각각의 코스와 관련한 인명과 지명, 사건명을 따서 길 이름을 지었고, 묵주기도가 지향하는 빛ㆍ영광ㆍ고통ㆍ환희, 그리고 은총의 길을 순례길 이름에 덧붙였다.6개 순례길은 제주도 천주교회 역사와 절묘하게 맞물려 저마다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느낌과 체험을 안겨준다. 2012년 9월 가장 먼저 개장한 김대건길(빛의 길)을 포함한 나머지 5개 순례길은 다음과 같다.
1. 김대건길(빛의길,12.6킬로미터) - 고산성당에서 시작해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된 수월봉인근과 자구내포구를 지나 성김대건신부 표착지인 용수성지를 둘러본 뒤 신창성당에 이르는 길이다. 2. 정난주길(빛의 길, 7㎞)-황사영의 아내인 정난주(마리아)의 묘가 있는 대정성지를 출발해 모슬포성당에 이르는 제주교구 여명의 길이다.3. 김기량길(영광의 길, 8.7㎞)-제주도 첫 순교자인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의 순교현양비를 시작으로 함덕마을과 관곶을 거쳐 조천성당에 이르는 길로, 제주 해안도로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하게 해준다.4. 신축화해길(고통의 길, 10.8㎞)-1901년 신축교안 때 희생된 신자들이 묻혀 있는 황사평성지를 떠나 화북포구, 곤을동, 별도천, 관덕정을 거쳐 중앙성당에 이르는 길이다.5. 하논성당길(환희의 길, 10.6㎞)-서귀포성당을 출발점으로 서귀포 신앙의 모태인 하논성당 터와 홍로성당이 있던 면형의 집을 거쳐 다시 서귀포성당으로 돌아옴으로써 시작과 끝이 연결돼 있음을 깨닫게 하는 성찰의 길이다. 2013.4.20 개장. '서귀포성당- 천지연(윗길)산책로 - 하논성당터- 봉림사 하논생태길-솜빈내- 흙담소나무길- 후박나무가로수길- 홍로현 현청길- 지장샘- 홍로성당터 면형의 집- 서귀복자 성당- 복자성당터- 서귀포성당'을 순환하는 코스다.6. 이시돌길(은총의 길, 18.2㎞)-새미 은총의 동산(이시돌)에서 조수공소를 거쳐 신창성당에 이르는 길로, 제주 중산간의 호젓함과 아름다움 속에서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5월 제주를 방문하여 서귀포 성당을 마지막으로 제주를 떠났다. 아직도 제주에는 가보지 못한 순례지가 많지만 가장 중요한 곳이었던 성 김대건 신부 표착지를 보았고 중앙성당과 서귀포성당을 보았으니 만족한다. 이번 정리는 내용이 좀 많다. 필요한 부분만이라도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라일보,서귀포성당카페,중앙성당홈페이지
2017.5.13 서귀포성당을 답사하고 이진귀 닐로
'삶을 풍요롭게 > 닐로의 천주교 이야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흥남철수의 주역` 라루 선장, 천주교 성인으로 추앙 (0) | 2018.02.27 |
---|---|
[스크랩] 경기도 안성의 미리내 성지 `게쎄마니 동산` 답사 (0) | 2018.02.27 |
[스크랩] 제주 용수의 라파엘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일행` 표착지 답사 (0) | 2018.02.27 |
[스크랩] 제주교구 주교좌 중앙성당 답사기 (0) | 2018.02.27 |
[스크랩] 마산교구 진주지구 남해성당 (0) | 2018.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