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남쪽 남해섬의 또 다른 딸린섬 창선도(창선면)....
쪽빛 바다를 놀이터 삼아 자라난 어린시절
척박한 땅에 풍족하지 못한 살림.
겨우 소 키우고, 고구마 심고 빼때기(말린 고구마) 말려 돈 팔고 마늘 심어
학비 마련해 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디 넉넉하게 벼농사 지을 땅이 있나요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삼천포(지금의 사천)로 건너가 뭍 내음도 맞고
진주로도 들러서 공부하려는 맘 크게 먹어
꿈을 다듬어 왔습니다.
1955년 4월 18일생
창선면 부윤리에서 태어나고 창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8년 경상대학교 임학과를 들어 가셨네요
그러고 학교를 마치시고 ROTC16기로 임관이 되었습니다.
합천출신인 합천보건소에서 공직 생활을 하시던 최호숙여사를 만나
슬하에 1남 3녀를 두셨습니다.
그런데 고인은 이제껏 뭘 하셨기에 넉넉한 재산도 모으지 않으시고
가족에게 빛만 남겨 두셨습니까
작년 3월 고인의 재산공개 때 재산이 마이너스 3000만원이랍니다
뜻이 너무 돋보이면 가난도 대물림이 되나요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농민을 먼저 생각하시다 이렇게 되신 건가요
남해에서 한우를 키우면서 농업경영을 생각하시면서
또 이장을 시작으로 하신 이후
1998년 한농연(한국농엽경영인연합회) 경남도 회장
2000~2002년 한국농업경영인 중앙회회장, 한국 농어민 신문 사장, 농협중앙회 개혁위원
2000~2004년 열린우리당 당의장 농업특보
2002년 세계농업관련 NGO 협회 회장
2004.5~2005.1 제17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2005.1~2007.8 제55대 농림부장관
2005.12.15 = 박홍수 농림부 장관, 미국과 쇠고기 협상 착수 공식 발언
2008.1~ 통합민주당 최고위원, 사무총장
2008.4~ 민주당 미국쇠고기 대책위원장
2008.5.13 과로로 심장병 재발 세브란스 병원 입원, 의식불명
2008.6.10 오후 5시17분 53세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
지금 고인 앞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쌓여 있는지 아시기나 하는 겁니까?
고인이 가신 자리가 너무나 커 보입니다.
고인이 가시는 그날 광화문의 세종로에는 촛불집회에 근 70만 이상이 모였고
전국에서 100만명 이상이 거리에 나와서 소고기 협상에 대한 정부의실책을 성토하고
정치적인 구호를 외치고 있을때
이제 고인은 한 시름 놓은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라는 것입니까
정말 손을 놓으시고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저 역시 남해의 농촌에서 자라 지금 고향을 떠나 있지만
저는 고인만큼 농촌을 절실하게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오직 그 어려움과 가난을 벗어나고자 노력해 왔고 그래서
지금 농촌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따라서 고인에게는 너무나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그래도 고인과 같은 분이 있어 한편으로는 안심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가시면 어떻합니까, 할일이 많으신데....
가신 그 길을 그나마 세종로는 밤새 촛불로 밝혀 주었습니다.
나머지 일들은 또 다른 훌륭한 분들이 나타나 해결할 겁니다.
맘 편히 놓으시고 편히 쉬십시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세브란스에서 한농연 노제로 이동하고 다시 남해를 향해
길을 떠나고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상여가 많이 흔들리더라도 곡소리를 많이 들으시더라도
맘 아파 하시지 마십시오.
다시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인께서 하신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다음 내용은 언론에 나온 기사들을 재
구성한 것입니다. 빠진 내용도 있고 다른 분의 의견도 있습니다.
문화일보 2008.6.11 서의동기자
한미FTA 협상당시 농업이 딜브레이커(협상결렬요인)이라며 미국은 물론
부처 안밖에서 압력해 왓음에도 농업분야의 개방폭을 줄이려던 뚝심을 보여
주셨고, 그 덕에 농업 협상은 전체 협상 균형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선방 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농림부 장관으로 2년 8개월간 재직한 고인은 참여정부의 농업정책인 농업·농촌
종합대책을 세웠고 농지은행 설립 등 굵직한 정책을 입안했습니다. 농정의 일대
전환으로 기록될 농가 등록제도 그의 재직 중 정책의 틀을 갖췄습니다. 이명박정부의
농정 토대도 그의 재직 중 마련됐습니다. 1차 산업인 농업을 2·3차 산업인 식품·유통과
결합해 부가가치 높은 융·복합 산업으로 차원을 높이는 방안도 종합대책에 포함돼
있었습니다.
박 총장은 농림부 장관 재직 시 쇠고기 시장 전면 개방을 주장한 경제부처와 외교부의
압박에 “미국산 쇠고기 검역은 통상 문제가 아닌 국민 건강과 직결된 문제”라며
30개월령 이상 쇠고기 수입금지를 관철했습니다.
고인은 부처내에서도 외모만큼이나 선이 굵은 업무처리로 관료사회의 두꺼운 벽을
뛰어넘었다. 농림수산식품부의 한 고위관료는 “역대 어느 장관보다도 부하들에게
재량권을 많이 준 장관”이라고 말했다. 그의 퇴임식 때 중앙행정기관 공무원 노조
농림부지부는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밥장관’이라고 칭하면서 웃음을 잃지 않던
그의 소탈하고 정 많은 모습을 추억하는 관료들도 적지 않다. 농림수산식품부의 한
간부는 “뜻밖에도 엄청나게 가정적이어서 사석에서 가족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농림부에서 고인을 옆에서 모셨던 사람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눈물의 자장면-한겨레)
노무현 대통령님이 말하셨다는 에피소드...
장관 재직시절 미국산쇠고기에서 뼈 조각이 발견돼 검역이 중단된 적이 있습니다.
외교통상라인은 대충 넘어가자고 했고
노무현 대통령님도 그때는 심각성을 몰라 수입을 재개하자고 했답니다...
그때 박홍수 전 장관이 절대 불가하다고 버텼고
결국 미국산쇠고기는 들어오지 않았답니다...
"그때 박홍수 전 장관이 없었다면 나는 큰 실수를 할 뻔 했다."고
노무현 대통령님이 회고하셨답니다...
저는 농림부 홍보를 주로 하고 있어 박홍수 장관 시절을 조금 기억합니다...
그때는 농림부 공무원들이 참 열심히 했습니다...
기존 관행을 벗어나 창의적인 아이디어, 정책, 홍보들이 많았습니다...
"공무원들이 참 많이 바뀌었네."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 모든 게 고인의 탓이라 말한순 없지만 큰 역할을 했음은 부인하지 못합니다...
재임시절 과청청사앞에서 농민집회가 한 건도 없었답니다...
그만큼 농민의 마음을 헤아리고 어루만졌던 고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김미화의 세계는지금 그리고 우리는(4월 18일금)에 출연하셔서
요점은 이번 이명박정부에서의 쇠고기 수입 협상의 문제는
원칙이 전혀 지켜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수입개방 문제는
이런 협상은 한국과 미국간에 맺어진 수입위생조건 개정입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미국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는 수입 확대방안을 논의한 것 같아 허탈합니다.
한미FTA 문제는 관세에 관련된 문제이고 한미쇠고기협상 문제는 위생과 검역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두 가지는 끝까지 저희들이 분리시키고 그렇게 노력을
했고 또 그렇게 진행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아마 많은 국내 소비자
단체들도 논평을 낼 것이고 또한 직접적으로 소를 사육하는 농가들도 논평을 낼
것입니다만 과연 이번 수입위생조건의 개정에 있어서 우리 정부가 가지고 있던
원칙이 무엇이었는지 하나 예를 들어드리면 미국이 광우병이 발생했을 시에는
과거에는 즉각 수입금지 조치가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번 협상결과를 보니까
미국이 광우병이 발생해도 우리는 즉각적으로 수입금지 조치를 내릴 수 없는 그러한
형태로 협상이 마무리 됐는데요. 미국 측이 자체적으로 역학조사를 마치고 그 결과를
OIE에 질의를 해서 OIE 판결에 따라서 우리가 수입금지 조치를 할 수밖에 없는 이런
형식의 협상은 이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그런 부분입니다.
한농연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셨습니다. (출처 :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농정실패로 인한 농가부채가 극에 달하던 시절 농가부채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고속도로를 점거하는 등 농민들의 어려운 실정을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켰으며,
2000년 2월 24일 “농가부채특별법 제정 및 마사회 농림부 환원을 위한 전국농민대회”
를 서울 여의도에게 개최하고 전국 1만여 농민이 상경해 투쟁에 돌입하였다. 뿐만
아니라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단식 농성, 2000년 11월 약 10만여명 상경투쟁 주도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벌여갔다. 이로 인해, 2002년 말 “농어업인부채 경감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는 성공적인 투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2001년 우리농산물 사용을 통해 학생들의 건강도모와 국내농산물 소비확대를
위한 학교급식법 개정활동을 국내에서 처음 시작하는 등 제도적 장치 마련을 통한
국내농업 보호에도 주력하였으며, 또한 “농어촌복지에 관한 특별법” 제정 운동을
기획하고 이를 주도해가며, 각종 토론회 개최, 서명운동 전개, 국회의원 서명운동,
입법청원 등 활동을 벌여갔다.
농업협동조합 개혁운동에 있어서도 지속적인 활동을 하며, 협동조합개혁위원회를
연중 가동시키고 한농연 출신 인사들의 조합장 진출을 적극 독려하며 2002년에는
농축협조합장에 150여명이 넘는 한농연 회원들이 조합장으로 당선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외에도 한중 마늘협상에 대한 대응투쟁과 이후 밝혀진 이면협상규탄 투쟁을
전개하며 2002년 10월에는 보라매공원에서 집회를 개최하며 전국 고속도로 점거
시위를 병행해 협상책임자 문책 요구를 관철시키게 되었다.
이런 정부의 잘못된 농정에 대한 대응만이 아니라 반농업세력과의 대결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2002년 당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었던 박용성 두산그룹회장의
반농업 발언을 문제삼아 전국적인 두산제품 불매운동을 전개하면서 농촌지역
매장에서 두산제품을 농민들이 직접 철수시키는 물리적 실력행사를 하고 이런
두산불매운동이 전국적으로 그리고 타농민단체들의 동참으로 이어지자 박용성
회장의 사과를 이끌어내면서 불매운동을 끝내게 되었다.
또한, 마사회의 농림부 환원 운동과 한칠레 FTA 협상이 시작되었던 2002년에는
농림부장관실을 점거하는 등 반대운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투쟁을 통한 농민운동뿐만 아니라 한농연 조직을 통한 모금과 외부후원 등을 통해
불우한 농촌어린이들을 지원하고자 한국농촌아동복지위원회를 결성하고 기금을
확보해 지금까지 어린이들에 대한 지원활동이 진행되고 있고 불우이웃을 돕고자
하는 푸드뱅크 사업에 전국적인 모금으로 쌀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사회활동도
병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서도 최근까지 통합민주당 사무총장을 역임하면서 잘못된 쇠고기협상에 대한
비판과 투쟁을 조직하는 활동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등 우리 농업계에 없어서는
안 될 큰 인물을 잃게 되었다.
[나에게 정치란]박홍수 "병따개" 머니투데이 2008.5.2
"생활정치를 해야죠, 이념정치는 더 이상 안 먹혀요. 국민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자면
문제가 뭔지 알아야하고 그러자면 현장에 가야 합니다. 의정활동을 평가할 때 발의한
법안의 개수를 보죠? 하지만 개수보다 더 중요한 게 그 법안이 얼마나 국민 요구에
딱 들어맞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굳이 정치를 정의하자면 '병따개'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경운기 수리할 때 지름 3㎜짜리 볼트를 푼다고 칩시다. 그럼 5㎜짜리 스패너 한 트럭을
갖다 줘도 안돼요. 딱 3㎜짜리 스패너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음료수병을 열 때도 뚜껑에
딱 맞는 병따개 하나만 있으면 돼요."
정치엔 '균형'도 중요하다. 어느 한 쪽의 얘기만 들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최근 한미 쇠고기 협상 결과와 이후 정부의 대응은 꽤 유감스럽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벌어지던 때 농림부 장관이었다.
"정치를 해도 균형감각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특히 외국과 협상은 아주 주도 면밀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새 정부는 국무조정, 즉 균형을 잡는 기능에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걱정돼요."
국회 쇠고기 청문회 출석 연합뉴스/프레시안 2008.5.7
반면 참여정부 농림부 장관을 지낸 통합민주당 박홍수 사무총장은 "노무현 정부는
국민 건강과 농어민 소득에 관한 문제를 우선순위를 두고 일을 풀어 나갔다"면서
"졸속이라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표현이고 (이번 협상은) 많은 부분 미흡한 것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쇠고기파문에 불을 붙인 PD수첩 방송의 인터뷰에선 장관역임 시절 미국의 쇠고기 협상
요구에 대해 "'그건 당신들의 희망사항이고 욕심이지'라며 맞서 우리 입장을 고수했다"고
밝혀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고 지난달 쇠고기 청문회 당시 증인석에 나섰을땐 인터넷
생중계를 지켜보던 네티즌들에게 소신 발언으로 "격조 있는 장관"이란 찬사를 이끌어냈다
성 전 실장은 "참여정부의 쇠고기 협상 원칙은 국민 건강이 최우선이었다"며 "
미국이 지속적으로 전 연령과 전 부위를 개방하라고 했으나 우리는 수용할 수는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특정위험물질(SRM) 예방을 위한 연령 표시, 검역 시스템 유지,
광우병 발생시 긴급조치 권한 유지 등이 안 된다면 (수입 재개가) 안 된다는 것이
참여정부의 일관적 입장"면서 "설거지, 뒤치다꺼리를 했다는 지적이 있는데
그런 식의 지적은 옳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성 전 실장 재직 시 농림부 장관을 지낸 박홍수 사무총장도 "30개월령 이상
수입금지 등 참여정부 때의 협상기준 및 원칙과 이번 협상 결과는 전혀 다르다"며
"참여정부는 원칙을 지켰다"고 입을 맞췄다.
2008.6.14 산만디
'시사 관심꺼리 > 정치군사사회역사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대만의 직항로 개통 그리고 지도자의 선택 (0) | 2008.07.05 |
---|---|
Bad Cow Disease (0) | 2008.06.14 |
한국 촛불집회에 대한 중국 cctv 뉴스 내용 (0) | 2008.06.11 |
6월8일 빗속의 서울광장 (0) | 2008.06.10 |
광우병 촛불집회의 종착역은 없는가 (0) | 2008.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