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야 이곳에 왔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등장하는 많은 박해 속에서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인은 특별하다. 바로 한국 최초의 외국인 신부였던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군문효수 당했고 한국인 최초의 사제였던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이 군문효수를 당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14분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보다 더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는 주장이 제기 되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때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여 이 곳의 첫 순교자자 되었다. 1839년기해박해에는 제 2대 조선 교구장 앵베르 주교,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순교하였고, 1846년 병오박해떼는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현석문 가롤로, 1866년 병인박해떼는 제 4대 조선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푸르티에 신부, 정의배 마르코와 우세영 알렉시오가 모두 군문효수형으로 순교 하였다.
[출처] 도보순례 (4) - 새남터 성지 / 새남터 기념관|작성자 전주희
억새와 나무가 많았던 '새남터'는 조선시대 군사를 훈련시키는 연무장이자 죄인들을 처형시키는 장소였다고 한다.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의미 있는 이곳을 성지로 조성하려는 움직임은 일제강점기에도 있었으나, 1956년 비석이 세워지면서 본격화됐다. 성당은 30여년 뒤인 1987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가 준공했다. 새남터성당은 박태연 명지대 겸임교수가 설계했다.
지금의 새남터는 외관상으로는 독특한 한옥 스타일을 보여 주고 있어 눈에 쉽게 들어 오지만, 바로 옆에 철도 선로가 있어 무척 소음이 심하고 흔들림이 많아 보였다. 그 주변은 아파트가 들어 서 있어 새남터 유적지를 에워싸고 있다.
이 곳이 바로 새남터 형장이다. 정상적으로는 들어 올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선교를 위해 조선땅을 밟고 교우들을 만나고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생활에서도 오로지 하느님 나라만을 보면서 살 다가 끝내 붙잡혀 죽어가야 했던 것이 당시 조선의 상황이었다. 그 암울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끈을 이어 준 순교자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이 땅에 천주교의 꽃이 이정도 피어 날 수 있었다.
2016.11.13 새남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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