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흑산도여행, 택시로 돌아보는 흑산섬 일주 여행>
9월 3일 토요일
홍도에서 10시 30분에 출발해 11시에 대흑산도(본섬) 여객선 부두에 도착했다. 날씨는 맑았고 홍도와 흑산도 사이의 장도섬을 확인하면서 흑산도로 들어 온 것이다. 오늘의 여행일정은 섬일주관광후 칠락산 등산. 그리고 내일 목포로 나가 증도로 갈 예정.
홍도에서 출발전에 갑자기 흑산도에 숙박할 곳인 통나무팬션의 유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손을 다쳐 목포에 치료 받으러 가는 바람에 픽업을 못하고 대신 택시를 보내 마중 나가게 준비해 두었다고 하니 택시 기사를 만나면 된다고 했다. 택시 기사 연락처도 보내 주었다. 무슨 일을 하다가 다친 것인지 모르지만 치료 잘 하고 돌아 오시라고 했다. 팬션은 유사장 부친이 관리하고 있으니 찾아 가면 된단다.
흑산도는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97.2km 떨어져 있으며, 홍도, 다물도, 대둔도, 영산도, 장도, 가거도, 만재도, 태도 등과 함께 흑산군도를 이룬다. 산과 바다가 파랗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해서 흑산도(黑山島) 라 부른다고 한다. 최고점은 문암산(405m)이며, 깃대봉 (378m), 선유봉(307m), 상라봉(227m) 등이 솟아 있어 섬 전체가 산지를 이루고 있다. 등산으로 유명한 칠락봉은 272미터다. 흑산도는 흑산면의 주된 섬이다. 흑산면은 흑산도와 장도, 영산도, 태도,홍도를 포함한 곳으로 인구수는 2370여 세대, 3990여명이다.
마중 나온 택시 기사가 안내 해 주는 대로 통나무팬션에 도착했다. 골목을 돌아 들어가니 어리한 집이 나타난다. 높이가 있어 전망도 좋다. 할아버지(유대표 부친)가 열쇠를 가져다 준다. 짐을 내려 놓고 정리한 후 곧장 대흑산도 일주 여행을 하기로 했다.
터미널을 지나 흑산도 중심부를 지나갔다. 녹십자약국이 눈에 들어 온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흑산성당이다.
흑산성당
흑산성당은 2019년 국가등록문화재 제759호로 등재 되었다.
흑산성당은 우리나라 서남해의 최남단에 위치한 흑산도에 천주교가 전파되어 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장소로, 선교뿐 아니라 교육, 의료 등 다양한 분야의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낙후되었던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했던 점에서 종교적 가치 및 지역사적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는 점에 문화재로 등재된 것이다.
1층 석조 건물인 성당은 정면 중앙부에 사방으로 열린 종탑을 설치하고, 바닷가에서 구해온 몽돌을 건축재료로 활용하는 등 건축사적 가치도 인정받아 문화재 반열에 올랐다. 흑산도는 1801년 정약전이 신유박해로 유배 오면서 혹여 천주교가 전파되었을 것이라는 인과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선교활동의 연관성은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흑산도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951년으로 이곳 출신 천주교 신자인 조수덕이 고향으로 돌아 오면서 천주교가 전래된 것이다. 조수덕의 전교 활동으로 신자수가 늘어나자 아버지를 통해 목포 산정동 본당의 모란 신부에게 선교 전망을 알리게 되었다. 이에 모란 신부는 1952년 정용관 전교회장을 파견하여 사목활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했다. 동시에 흑산도 주민의 어려운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구제회를 통해 구호품을 전달하면서 신도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신자수가 늘어나자 1951년 8월 죽항리에, 54년에는 장도에, 56년 심리, 57년에 사리에 공소가 차례로 들어서며 교세가 확장하였다.. 57년 진리에 골롬반 선교회의 도움을 받아 성당 터를 마련하고, 58년 11월 성당을 건립했다. 산정동 본당은 브라질(Brazil·한국명 진) 요한 신부를 이곳에 파견했다.
현재는 광주대교구 목포신안 소속으로 소유주는 (재)광주구천주교회유지재단, 주임신부는 박상선 헨리코 신부, 설립일 1958년 11월 11일. 수호성인은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 현재의 신자수는 1150여명 남짓하다.
관할하는 곳은 신안군 흑산면 일대(다촌공소, 사리공소, 오리공소, 장도공소, 홍도1구공소, 홍도2구공소 포함)다.
흑산성당은 문화재 등재후 정부지원등의 자금으로 성역화 사업을 추진중이다. 너무 요란스런 성역화 사업이 아닌지 조금은 우려스럽다. 현재 휴교되어 있는 사리 흑산 초교는 자산어보 전시관과 게스트 하우스로 활용 계획을 세우고도 있다.
흑산성당앞에는 2021년 8월 문을 연 흑산문화관광호텔이 있다. (재)광주구천주교회유지재단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피정의 집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지상 5층의 객실 49개 보유. 식당, 회의실, 세미나실 등 부대시설도 있다. 올해에는 팬션 10동을 지어 (묵상의 집) 힐링, 휴식의 공간으로 활용하도록 준비중에 있다.
흑산성당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이야기한 이유는 앞으로 흑산도는 분명 흑산성당이 섬 주민들의 생활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흑산성당 옆의 팽나무 두 그루는 가지가 붙어 연리지다.
법정의 출가 이야기가 있는 #철새박물관은 안들리고 지나 갔다.
진리성황당
진리성황당은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공간이지만 지나 갔다. 당각시 전설이 깃든 각시당(처녀당), 해변 쪽의 용왕당 등으로 이뤄졌다. 각시당에서 용왕당까지 약 150m 구간에 성황림이 우거졌다. 귀신을 부른다는 초령목, 늙은 소나무, 신우대 등이 제법 깊은 숲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초령목은 목련과에 속하는 사계절 푸른잎을 자랑하는 상록수로 목련중 제일먼저 흰색의 꽃이 개화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신안군 흑산도에 43그루의 대규모 군락과 제주도에 2그루만 자생하고 있는 멸종위기 희귀 수종으로 나뭇가지를 불전에 꽂아 귀신을 부른다는 설에 따라 붙여진 것이라 하여 일명 "귀신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무심사지터.
구불구불한 해안일주도로를 12구비를 돌아가면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서 있는 상라산전망대에 이른다. 이곳에 서면 흑산도 전경과 함께 예리항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뒤돌아서면 탁 트인 다도해를 배경으로 대장도와 소장도가 눈앞을 가로 막는다. 상라봉 정상의 제사터(봉화대) 아래로는 반달모양의 '상라산성'이 있다. 해상왕 장보고가 해상 무역을 왕성하게 벌일 때 전진기지로 삼았다고 한다.
흑산도 아가씨
남 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한없이 외로운 달빛을 안고
흘러온 나그넨가 귀양살인가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은
그리다가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이미자노래)
상라산전망대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통나무팬션 유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태풍 힌남노 때문에 내일 배출항이 안되니 오늘 흑산도를 빠져 나가야 한단다. 자기도 오늘 급히 흑산도로 돌아 온다고 했다. 마음이 갑자기 다급해진다. 일단 택시 섬일주 관광은 문제가 없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오후 배편을 알아 보기로 했다.
한반도 지도바위
지피리(심리)
깊은 산골짜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지푸미, 심촌이라 부르다가 이후 심리(지피리)라 하였다.
암동마을 - 오른쪽 길로 가야 나옴
살기가 힘든 어두운 곳이라 하여 심리 마을 사람들이 붙인 지명이다.
사리 유배문화공원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전의 유배지.
정약용의 형으로 세례명은 안드레아다. 자산어보(또는 현산어보)의 저자이며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기를 쓴 표해시말을 썼다. 표해시말은 원본은 없고 필사본이 이강회가 쓴 유암총서에 기록되어 있다.
정약전은 신유박해 사건으로 1801년 완도군 신유도에 처음 유배되었으나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소흑산도(우이도)로 유배지를 옮겼다. 우이도로 갔다가 다시 대흑산도 사리(1807년)로 옮겼다. 그 때 복성재와 사촌서당을 운영했다. 정약용이 해배되자 다시 우이도(1815년)에 와서 살다가 죽고(1816년) 표류시말의 당사자인 문순득과 마을 사람들이 장례를 도왔다.
본향안치(本鄕安置) 조선 시대, 죄인을 그의 고향에 내려 보내 거주를 제한하던 유형. 본인의 고향에서만 유배생활을 하도록 하는 가벼운 죄인의 안치 등이다.
절도안치(絶島安置) 조선 시대에, 죄인을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으로 유배 보내 안치시키던 일.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을 귀양살이하는 곳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탱자나무 울티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일을 이르던 말. 위리안치에 해당하는 죄인은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가 많은 전라도 연해의 섬에 보냈다. 그러나 안치 이외의 유배형은 대개 그곳의 주민과 어울려서 사는 것을 묵인하기도 하였고, 가족 또는 제자를 데려가게 해주기도 하였다.
위리천극(圍籬栫棘)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흙둑을 쌓고 그 주위에 다시 가시로 울타리를 쳐서 자유를 구속하던 형벌. 위리안치보다 무거운 형벌로, 주로 전라도의 바닷가나 섬에 가두었다.
복성재(사촌서당),
사리는 모래미촌(사미촌)로 불렸다. 복성재에서는 정약전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당으로 사용한 곳이다. 복성은 서학(천주교)를 버리고 성리학으로 돌아 간다는 뜻을 품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인 박인수라는 인물을 생각하면 정약전 역시 서학을 버리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시에 사리에서 거주했던 곳이 박인수의 집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사촌은 沙邨=沙村으로 대체 가능. 촌은 마을이라는 뜻.
천주교 흑산성당 사리 공소
1957년에 설립된 공소. 공소 앞에 우물터가 있다.
흑산도 유배인 명단
유배를 온 이유가 다양하다.
1693년 나인 정숙이 유배 온 이유가 해괴한 짓이다. 정약전은 사학죄인(천주교 신유박해), 최익현은 상소
조선시대 유배를 온 사람들의 대다수는 소흑산도였던 우이도(지금은 도초면 소속)로 유배를 왔었다. 대흑산도로 유베를 온 것이 아니었다.
정약전의 유배 이야기에서 두가지를 덧붙인다.
하나는 김훈 소설가가 쓴 《黑山흑산》이라는 소설이다. 상하이 있을 때 읽은 소설인데, 이 내용에는 정약전이 유배를 떠나기전의 내용과 유배지로 떠나는 상황 그리고 유배지 생활 일부가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흑산(도)라는 지명 속에 구체적으로 우이도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서당을 사리포구에 설립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우이도에서도 먼저 서당을 시작했고 결혼하여 아이도 두었다. 이 때 홍어장수 표류객 문순득을 만나 표해시말을 쓰게 된다. 생활이이 어려워 1807년 대흑산도로 와서 사촌서당을 열었다. 소설은 소설로 족하다.
흑산의 내용중 무안에서 흑산도로 배를 타고 가는 장면 <사공>중
“장교는 소리쳤다. 문풍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장교는 흔들리는 뱃바닥을 기면서 어디론지 가려는 시늉을 하다가 나동그라졌다. 어물 장수들이 내지른 토사물과 똥오줌에 정약전은 딩굴었다. 배가 치솟고 가라앉을 때마다, 의금부 형틀에서 매를 맞을 때, 하얗게 뒤집히던 고통이 다시 살아났다. 다시 배가 가라앉을 때 정약전은 의식을 잃었다.”54쪽
두번째는 정약전은 우이도에 살면서 일본 오끼나와와 필리핀까지 표류했던 홍어장수 문순득을 만나고 그의 말을 참고 삼아 <표해시말>을 썼다는 것이다. 원문은 남아 있지 않으나 유암총서(이강회 지음) 등에 필사본이 존재한다. 이 책에는 중요한 기록들이 있어 일본 등에서도 사료적 가치를 인정 받아 높이 평가되고 있는 책이다.
정약전 등 흑산도(우이도를 포함한 흑산도)에 유배를 왔던 유배인들(최익현 등)을 생각하면서 다시 장소를 이동한다.
칠형제의 전설이 있는 천연 방파제 칠형제바위
검머리를 돌아 넘어 옴.
흑산도 여객터미널
자산문화도서관
자산어보(현산어보)의 저자 손암 정약전 안드레아에 대해 좀 더 자세한 기록과 자료들을 접할 수 있다.
뉴성우정식당
기사의 안내로 홍어회를 먹기 위해 들린 식당에서 우연히 알게 된 말린홍어를 샀다. 쪄서 버무려서 먹으면 맛이 일품이다. 수협에 납품하지 못 한 홍어(수량 제한 때문에)를 하는 수 없이 이렇게라도 팔아야 한단다.
홍어잡이 배에는 요즘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단다. 홍어조차도 이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잡아 올리는 것이다.
흑산도여 안녕!
다시 한 번 더 와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칠락산 등산도 못했고 자세히 못 본 곳도 남아 있다. 도초면 우이도를 엮어서 와야 정약전이 더 자세히 보일 것 같다.
2022.09.18 흑산도여행, 이진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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