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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김명리 시인의 시 「봄날, 노근란도를 그리다」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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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김명리 시인의 시 감상 >

봄날, 노근란도를 그리다

신록의 눈금이 빗줄기처럼 촘촘해지는 봄날 오후에 낙향한 필경사가 털 없는 붓으로 흙 없고 가지 없는 난의 뿌리를 그린다

송(宋)의 유신(遺臣) 정사초(鄭思肖)의 심정을 빗줄기 꺾어 모아 헤아려 쓰기를

그대 빰 위로 드리운 복사꽃 살구꽃이 실은 허공의 고름주머니요 세상에 베인 상처는 몸속으로 난 길이 아니니 더는 깊이 네 안으로 파고들지 말거라

황망지간에 오색 주전골 낙뢰 맞은 소나무 둥치에 주질러 놓았던 댓바람 속 화염을 단검처럼 뽑아들며

벌벌벌 떨리는 수전증 앓는 손이 노근란 굽은 뿌리 옆으로 새파란 어린 난 한 굽이를 단숨에 내리치나니

무 밑동 닮은 누대의 달과 꽃과 새와 시내와 바윗덩이가 화선지 위로부터 우르르 쾅쾅

잡풀 무성한 내 집 마당의 물 없는 우물 속으로 대번에 굴러떨어지더라

초춘의 아침부터 맹동의 저녁답까지 우왕좌왕 비의 냄새 바람의 자취로만 불려다니던 미친 봄날의 노근란도 (露根蘭圖)가

사람 떠난 집터 잡풀 무성한 옛 우물 속에서 삼백 년 세월만에 그 잡스러운 뿌리를 기어이 활짝 드러내었다고 하더라

(전문)

바람 불고 고요한

김명리지음, 문학동네, 2022.09.07, 124쪽, 10,000원

 
바람 불고 고요한(문학동네시인선 179)
시집은 총 네 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자연물을 통해 느끼는 생명의 작은 기미들과 인간 삶의 본질적인 쓸쓸함을, 2부는 어머니라는 소중한 대상을, 3부는 우리 주위에서 함께 살아가는 연약한 몸을 지닌 동물들을 바라본다. 4부는 이 모든 시상을 아우르는 작품들로 존재를 향한 연민 어린 시선을 보여준다.
저자
김명리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22.09.07

 

오늘은 어린 제자와 같이 시를 배운다. 시를 읽고 좀 더 쉽게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작업이 필요하다.

‘필경사(筆耕士)’는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작가라고도 한다. 그리고 우선 ‘노근란도’를 알아야겠다. 노근란도(露根蘭圖)는 붓으로 난(란)을 그리는데 뿌리가 드러나게 그리는 그림이다. 남송(수도 항주) 때 살았던 정사초(鄭思肖 , 1241∼1318,복건성 복주 출생, 소주로 이사 후 살다가 사망)라는 사람이 있었던데, 남송이 원나라(몽고)에게 패하자, 원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고된 일도 겪었기에 원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남송을 그리워하면서 이런 그림을 남겼다. 그래서 이 그림을 충절의 기개가 있는 그림으로 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그림 없을까? 당연히 있지. 조선에서는 민영익이라는 화가가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자 청나라(상해)로 망명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 화가가 남긴 ‘노근란도’가 유명하다.

이제 또 시를 보자. ‘황망지간’은 뭔가요? '황망(慌忙)하다'는 말에서 나온 말로 한자식으로 써 놓았다. '어리둥절한 사이'로 풀이 된다. 이 시인이 가끔 한자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습관이 있더라. 다른 시에서도 그런 게 보여. ‘오색 주전골’은 설악산에 있는 골짜기 지명이다. ‘주질러’는 '주저앉다'처럼 쓰이는 말의 비표준어로 추정된다. ‘맹동(孟冬)’은 이른 겨울로 보통 11월(음력 10월)을 말한다. 충북 음성에 맹동이라는 동네(면소재지)도 있지. 대충 기초 작업은 끝났다.

시 한 편이 다루는 시간이 남송 때부터 현재까지니 얼추 잡아도 700년이 넘는다. 그런데 사실 시에서 마지막의 ‘우물 속에서 건진 300여년 전 난(蘭) 뿌리를 건졌다’고 하는 것이 핵심 소재인데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700년대를 이야기 한다. 어쩌면 정사초가 쓴 <심사心史>를 소주의 승천사 절 마른 우물속에 숨겨 두었다는 기록에서 연결 지은 느낌도 들기는 해. 1700년이면 조선은 영조, 정조 때다. 이처럼 시인의 상상력은 그래서 시공을 초월한단다. 다만, 시인이 지금 살고 있는 곳에 오래된 우물이 있었을 것 같다. 빈 집터가 있었겠지. 잡초가 무성했을 것이고 물이 없는 우물이 있었을 것이다. 거기 뭐가 있었을까? 나도 모르지.

그럼 이 시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아마도 올봄에 정부가 바뀌었지. 촛불 정부라고 하는 문재인 대통령 정부가 끝나고 윤석열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게 된 것이지. 거기에 빗대어 쓴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읽어 보면 내용이 이해가 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지. 시란 좀 더 포괄적이니, 세상을 은유하는 데에 딱 현실의 정치 상황을 노래하는 것만은 아니지.

그대 빰 위로 드리운 복사꽃 살구꽃이 실은 허공의 고름주머니요 세상에 베인 상처는 몸속으로 난 길이 아니니 더는 깊이 네 안으로 파고들지 말거라”라는 구절이 주는 의미를 다시 읽고 읽어 보아라.

그래도 오늘 정사초와 민영익의 노근란도(사진)는 제대로 배웠을 것이다.

 

 

오늘 수업 끝.

2022.10. 06. 이진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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