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김훈 작가가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인 『하얼빈』 을 출간하여 읽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黑山』 을 읽었습니다. 한 작가의 책을 동시에 읽기는 또 처음입니다. 『黑山』을 처음 읽은 것은 중국 상하이에 살면서 포동한인성당 교육관에 이 책이 있길래 읽었습니다. 당시는 천주교 초보자였기에 내용들이 낯선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랬기에 김훈 작가가 절두산 근처를 오가면서 천주교 순교자들을 생각했고, 황사영이 잡히게 되어 다시 흑산도로 유배간 정약전과 조선 후기 당시 천주교의 상황에 대해 이 책을 썼다는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천주교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 되면서 새롭게 조선의 천주교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정약전과 황사영도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 조선은 망했지만, 하나의 신념을 향해 나가면서 목숨도 내어 놓아야 했던 수 많은 사람들의 피(순교)를 천주교를 접하면서 현양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8월말에 흑산도를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영화 <자산어보> 때문에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김훈 작가가 쓴 『黑山』 때문이었습니다. 사리의 유배문화공원을 돌아보고 자산문화도서관도 보고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黑山』 을 도서관에서 빌려 와 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흑산이 내게 나타나고 난 후 새롭게 반추 되면서 흑산으로 걸어 들어간 시차가 대충 7년 정도 나는 것 같습니다. 소설속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 가다가 바위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장면이 계속해서 따라 옵니다.
정약전은 선창 옆 너럭바위에 앉아 생각한다
웃으면서 목이 잘린 동생 정약종의 죽음은 몇 달 전의 일이었지만, 전생의 꿈처럼 멀어졌고 멀수록 더욱 선명했다. 한때의 황홀했던 생각들을 버리고, 남을 끌어들여서 보존한 나의 목숨으로 이 세속의 땅 위에서 좀 더 머무는 것은 천주를 배반하는 것인가. 어째서 배반으로서만 삶은 가능한 것인가. 죽은 약종이 말했듯이, 나에게는 애초에 믿음이 없었으니 배반도 없는 것인가. 그런가, 아닌가.
바다는 땅 위에서 벌어진 모든 환란과 관련이 없이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으로 펼쳐져 있었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에서, 움트는 시간의 냄새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 너머 보이지 않는 어디인가가 흑산도였다. (18-19쪽)
-------------------------------------------
[알림] 포스팅을 읽으시고, 소신껏 느낌을 표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광고를 봐 주시면 블로거를 포스팅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
黑山(흑산), 저자 김훈, 출판사 도서출판학고재, 출간 2011.10.20.,
소설 『흑산』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조선 사회의 전통 문화와 새로운 서양 문화(구체적으로는 천주교)와 부딪히면서 발생한 억압 받고 핍박 받는 지식인들과 민초들의 삶을 보다 자세히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천주교에 연루되어 박해가 일어나(신유박해) 유배를 가게 된 정약전과 그의 조카사위(정약현의 사위)이자 조선 천주교회 젊은 지도자인 황사영의 삶과 죽음에 무게를 두고 『흑산』의 이야기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흑산』의 등장인물들은 위 두 사람 외에도 20여 명이 넘습니다. 천주교도들을 도륙하라며 다급히 자교를 내리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 황사영을 체포하기 위해 전직 포도청 비장 박차돌을 이용하는 우포도대장 이판수, 정약전을 유배지로 호송하는 무안 관아 장교, 유배지 흑산에서 왕과도 같은 권력을 휘두르는 수군진 별장 오칠구 등이 전통과 집권세력에 붙어 있는 인물들입니다.
또 다른 한 축으로는 어부 장팔수, 아들 창대를 비롯해 조 풍헌, 정약전 형제의 맏형 정약현 집안의 면천 노비로서 황사영을 돕는 김개동과 육손이 등은 조선 후기 신분 질서의 해체상과 혼돈을 드러내는 인물들입니다. 궁녀 출신 길갈녀와 새우젓 장수 강사녀 등의 등장도 박해의 대상이 된 인물입니다. 특히 마부 마노리는 북경 사행을 따른 길잡이의 경험으로 북경 교회와 황사영을 잇는 밀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배교한 천주교도이자 전직 포도청 비장 박차돌이 이중 첩자로서 쫓는 자와 쫓기는 자를 오가며 벌이는 역할과 여동생 박한녀와의 비극적인 해후와 이별은 극적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소설적 재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사공 문풍세, 남성들의 성적 대상으로 살아야만 했던 파주 현청의 관노 아리의 어미와 아리, 등짐 장수 오동희, 옹기 장수 최가람, 남편을 일찍 여의고 생선 다듬는 일을 하다 정약전과 살게 된 순매가 있습니다. 이 민초들의 삶 역시 큰 틀에서 정약전이나 황사영과 서로 얽혀 있는 삶들입니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서 물고기를 들여다보다가 죽은 유자儒者의 삶과 꿈, 희망과 좌절을 생각했다. 그 바다의 넓이와 거리가 내 생각을 가로막았고 나는 그 격절(隔絕)의 벽에 내 말들을 쏘아댔다. 새로운 삶을 증언하면서 죽임을 당한 자들이나 돌아서서 현세의 자리로 돌아온 자들이나, 누구도 삶을 단념할 수는 없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삶이 사라져 간 대흑산도의 유배문화공원에 불어 오는 바람이 먼 바다에서부터 불어 옴을 생각했습니다.삶이 살아 정약전이 흑산에 도착하여 유배 생활을 시작하는 소설 속의 『흑산』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책을 내려 놓아야 했습니다.
2022.10.11. 흑산을 다시 읽고, 이진귀
'책소식 > 책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더라면 정조처럼』에는 정조의 리더쉽 안내가 들어 있다 (0) | 2022.10.23 |
---|---|
최석균 시인의 시집 『유리창 한 장의 햇살』을 읽고 (2) | 2022.10.22 |
[독서]곽병희시인의 시집『도깨비바늘의 짝사랑』을 읽고 (0) | 2022.10.07 |
[독서] 김명리 시인의 시 : 「풀의 무게」 (0) | 2022.10.06 |
[독서]김명리 시인의 시 「봄날, 노근란도를 그리다」 감상 (2) | 2022.10.06 |